주가 조작과 연계된 것으로 의심되는 종목이 무더기로 하한가까지 급락한 사태가 또다시 벌어졌다. 지난 4월 말 소시에테제네랄(SG)증권발 급락 사태가 발생한 지 2개월도 채 안 돼서다. 금융당국은 시세조종 등 불공정거래 가능성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14일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인 방림, 동일산업, 만호제강, 대한방직과 코스닥시장 종목인 동일금속 등 총 5개 종목이 비슷한 시간에 일제히 하한가에 진입했다. 방림이 오전 11시46분께 가장 먼저 가격제한폭까지 내려갔고, 약 10분 뒤인 11시57분 동일금속이 하한가로 떨어졌다. 이어 낮 12시10분께 동일산업, 만호제강, 대한방직이 하한가에 진입했다.
어떤 과정을 통해 이들 5개 종목에서 대량 매물이 나와 하한가로 이어졌는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같은 시간대에 동시에 매물이 쏟아지며 폭락했다는 점에서 SG증권발 급락 사태가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다만 지난번 사태처럼 증권사 차액결제거래(CFD) 계좌와 연계된 반대매매 매물이 쏟아진 것은 아니라는 의견이 많다.
한국거래소는 5개 하한가 종목에 대해 “15일부터 해제 필요 시까지 매매 거래를 정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동일금속, 방림, 만호제강 등 3개 종목은 소수의 계좌에서 주식 거래가 집중된 혐의가 있다며 투자주의 종목으로 지정했다. 금융당국은 “신속한 거래 질서 정립과 투자자 보호 방안을 강구 중”이라며 “불공정 거래 가능성이 의심되는 종목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혐의 적발 시 무관용 원칙으로 엄중 조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300% 뛴 '천국의 계단株' 폭락…라덕연式 주가조작과 닮은꼴14일 가격제한폭까지 급락한 만호제강, 방림 등 5개 종목은 2~3년 전부터 주식투자자 사이에서 특별한 호재 없이 꾸준히 우상향하는 이른바 ‘천국의 계단주’로 불렸다. 증권업계에서 시세 조작 가능성이 있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된 종목이기도 하다. 특별한 호재 없이 몇 년간 조금씩 상승하다가 한순간에 폭락하는 주가 조작의 전형적인 패턴을 보인 만큼 금융당국도 시세조종에 무게를 두고 조사를 벌이고 있다. ○5개 종목, 실적·호재 없이 ‘급등’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만호제강의 주가는 2020년 초 1만5750원에서 이날 하한가를 맞기 직전인 13일 6만5400원까지 올랐다. 실적 개선 등 특별한 호재가 없음에도 약 3년 반 사이 315% 급등했다. 지난해 만호제강의 영업이익은 오히려 전년 대비 80% 감소한 2억원을 기록하며 뒷걸음쳤다.
같은 기간 2130원에서 7290원까지 242% 주가가 오른 방림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실적은 66% 감소했지만 주가는 계속해서 상승했다. 동일산업(285%), 동일금속(250%), 대한방직(168%) 등도 별다른 호재 없이 꾸준한 상승세를 보였다.
이들 5개 종목이 장기간에 걸쳐 계단식 상승을 보인 것은 지난 4월 말 라덕연 H투자자문 대표 일당의 주가 조작 사건으로 비화된 소시에테제네랄(SG)증권발 급락 사태 당시 하한가를 맞은 8개 종목과 비슷했다. 거래량이 적고 자산가치가 높은 종목이라는 점도 비슷했다.
다만 지난 사태와 달리 증권사 차액결제거래(CFD) 계좌와 연계된 반대매매 매물이 쏟아진 건 아닌 것으로 관측된다. 당시에는 매도 증권사가 SG증권으로 동일했지만 이번 하한가 종목 매도 창구는 국내 증권사로 다양하다. CFD를 제공하지 않는 증권사를 통해서도 매도 물량이 나온 것으로 파악됐다. ○5개 종목 모두 특정 커뮤니티가 추천이날 급락한 주식들은 가치투자를 지향하는 주식 관련 온라인 카페인 B투자연구소가 추천한 종목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이 온라인 카페 관련자들이 이날 하한가 사태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이유다.
이 카페를 운영하는 K씨는 지난 3년간 동일산업 동일금속 만호제강 방림 대한방직 등이 지나치게 저평가됐다는 내용의 글을 쓰며 투자자에게 매수를 추천했다. K씨는 이들 기업에 대해 소액주주운동을 벌이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K씨는 과거 주가 조작 혐의로 처벌받은 전력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2014년 2월부터 2015년 8월까지 약 1년6개월간 조광피혁, 삼양통상, 아이에스동서, 대한방직 등의 시세를 조종한 혐의였다. 당시 통정거래 등을 이용한 주가 조작으로 B투자연구소는 200억원의 부당이득을 챙겼고, 이 중 90억원을 K씨가 가져간 것으로 확인됐다. 2021년 대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 벌금 4억원을 선고받았다.
증권업계 일각에선 “시세조종을 의심한 증권사에서 대출을 연장해주지 않아 K씨 혹은 B투자연구소와 관련한 투자자가 매물을 쏟아낸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한 대형 증권사는 지난달 15일 8개 종목에 대해 대출 증거금률을 상향했는데 여기에 동일산업, 동일금속, 대한방직, 방림 등 4개 종목이 포함됐다.
이들 종목의 시세조종 가능성에 대한 의심은 주주들이 먼저 시작한 것으로 전해졌다. 몇몇 주주는 지난 4월 말 소시에테제네랄(SG)증권발 급락 사태가 터진 직후 ‘주식의 차트 모습으로 볼 때 주가 조작이 의심된다’며 금융당국에 제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감독당국 “즉시 거래 정지”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한국거래소는 이날 5개 종목에 대해 즉시 거래를 정지하는 ‘강수’를 뒀다. 회사 측에 대해서도 관련 내용에 대한 조회공시를 요구했다. 특히 몇몇 소수계좌의 거래가 집중된 방림, 만호제강, 동일금속 3개 종목은 투자주의 종목으로 지정했다.
금융당국은 이번 사태에 대해 “무관용 원칙으로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불공정거래 가능성이 높은 만큼 가능한 한 빠르게 조사를 마치겠다는 계획이다. 이날 국내 증시는 무더기 하한가 사태 등으로 투자심리가 악화하면서 하락했다. 코스피지수는 0.72% 떨어진 2619.08, 코스닥지수는 2.79% 급락한 871.83에 거래를 마쳤다.
성상훈/선한결 기자 up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