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준호의 딜 막전막후] '문앞 세일즈맨' 취급 받는 토종 PEF

입력 2023-06-13 18:11
수정 2023-07-13 00:02
▶마켓인사이트 6월 5일 오전 10시 15분

“출자자(LP)가 사모펀드(PEF) 운용사 의사결정에 개입할 수 없다지만 정말 답답할 노릇입니다.”

최근 만난 A연기금 고위 관계자의 하소연이다. 이달 들어 SK팜테코가 진행하는 6000억원 규모 소수지분 투자 유치전이 6곳 내외의 PEF 간 경쟁으로 좁혀졌는데, 이들 중 A연기금이 출자한 바이아웃 PEF만 3~4곳이라고 전하면서다. 이 관계자는 “바이아웃 PEF에 출자했을 땐 두 자릿수 이상의 성과를 기대했다”며 “하지만 잘해야 한 자릿수 수익을 보장받는 소수지분 투자에 바이아웃 PEF가 대거 뛰어들어 투자 전략이 혼선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바이아웃 PEF는 저평가된 기업의 경영권을 인수한 뒤 전문가들이 회사를 탈바꿈해 기업가치를 높이는 고위험·고수익 전략을 쓴다. 난도가 가장 높은 전략으로 꼽힌다. 하지만 바이아웃 전략을 내걸고 연기금 등 기관으로부터 출자금을 받은 PEF들이 실제론 기업의 소수지분 투자에 줄을 서는 현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내선 소수지분 투자에 치중 글로벌 시장에서 오랜 기간 PEF는 ‘문 앞의 야만인들’로 불려왔다. 1989년 거래 규모가 250억달러(약 31조원)에 달했던 미국 PEF 운용사 KKR의 RJR나비스코 인수전을 다룬 동명의 베스트셀러에서 유래했다. PEF들은 야만인 이미지를 벗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했지만 허사였다. 피인수 기업의 오너와 이사회에 PEF는 여전히 경영권 탈취를 시도하는 두려운 야만인 같은 존재다.

한국의 토종 바이아웃 PEF는 예외다. 기업 오너와 이사회에 긴장감을 불러오는 야만인은 찾아보기 어렵고 오히려 이들의 환대를 받는 세일즈맨이란 평가가 많다. 소수지분 투자 거래를 따내기 위해 기업으로부터 대기표를 받고 줄을 서기 때문이다. 심지어 제대로 된 실사 기회조차 주지 않는 카카오에도 줄을 선 토종 PEF가 많을 정도다.

불과 2~3년 전까지 유례없는 저금리 환경에서 많은 바이아웃 PEF가 소수지분 투자 후 상장(IPO) 등을 통해 단기간에 고수익을 거뒀다. 하지만 지난해 이후 금리 인상과 시장 불안정 등으로 투자 환경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국내 토종 바이아웃 PEF의 소수지분 투자 ‘중독’ 현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게 기관들의 불만이다. 손쉬운 수수료 수익 확대 목적최근 마무리됐거나 진행되고 있는 SK온, SK팜테코, SK에코플랜트 등 SK그룹 계열사의 수천억~1조원 단위 소수지분 투자 유치는 치열한 경쟁 속에 이뤄졌다. 수년 뒤 상장을 시도하고 실패하면 한 자릿수대 이자를 붙여 되갚아주겠다는 계약(옵션부 계약)을 천편일률적으로 맺고서다.

PEF들은 “경영권 인수만 추구하기엔 국내에 마땅한 투자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소연한다. 하지만 PEF가 소수지분 투자에 집중하는 본질적인 속내는 결국 수수료 수입 때문이란 설명이다.

PEF는 펀드 사이즈의 1.0~1.5%를 매년 운용수수료로 받는다. 기존 펀드 자금을 신속하게 소진하고 이 실적을 바탕으로 더 큰 후속 펀드를 조성해 더 많은 운용수수료를 받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옵션부 소수지분 투자라는 점은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이런 관행은 이제 변화를 앞두고 있다는 분석이 많아졌다. “유동성이란 수영장 물이 빠지기 시작한 올해부터 누가 벌거벗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본업인 바이아웃 투자에서 어떤 역량과 전략적 우수성을 기관들에 제시할 수 있는지가 유동성이 줄어든 환경에서 토종 PEF의 생존을 좌우하게 될 것이란 얘기다.

기관들도 토종 PEF 육성에 방점을 둔 자금 배분을 점차 재검토할 것으로 예상된다. 1조원이 넘는 토종 PEF가 10곳 가까이로 급증했기 때문이다. 글로벌 PEF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토종 PEF는 바이아웃 투자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