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로 주조법 만들고 앱으로 주문해 픽업…술판 바꾸는 '술타트업' [긱스]

입력 2023-06-07 17:41
수정 2023-06-15 16:40
이 기사는 프리미엄 스타트업 미디어 플랫폼 한경 긱스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빡치주, 개빡치주, 경복궁, 남산, 서울숲, 성수동, 연남동 누나….

무엇을 나열한 것일까. 답은 국내 스타트업들이 만드는 소주, 맥주 이름이다. 빡치주와 개빡치주는 토종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스타트업 왓챠가 전통주 기업 술샘양조장과 협업해 내놓은 증류식 소주다. 경복궁과 남산은 수제맥주 기업 카브루의 에일맥주이고, 서울숲과 성수동은 각각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의 라거와 페일에일 맥주다. 연남동 누나는 더쎄를라잇브루잉의 대표 흑맥주다.

대기업과 수입업체 중심의 국내 주류(酒類) 시장에서 비주류(非主流)인 스타트업이 맹활약하고 있다. 이들 스타트업은 중소형 양조장·브루어리 등을 갖추고 정보기술(IT)까지 결합해 새로운 주류 상품을 내놓고 있다. 술맛에 대해 전통 주류 회사와는 다른 경험을 제시하고, ‘힙’한 감성까지 더해 MZ세대(밀레니얼+Z세대)를 공략하는 게 특징이다. 수도권뿐만 아니라 지역에서도 청년들의 ‘술타트업’ 창업은 이어지고 있다. AI가 기획한 술도 나와
“맛있는 하이볼 레시피를 알려줘, 캔의 디자인은 어떻게 할까, 가격은 얼마로 해야 할까?” 버터맥주로 유명한 주류 스타트업 부루구루는 인공지능(AI) 스타트업 업스테이지가 선보인 AI 챗봇 ‘아숙업(AskUp)’에 이런 질문들을 해봤다. 그러자 아숙업은 레시피와 맛, 이름, 캔 디자인, 구체적 사양까지 추천해줬다. 이를 바탕으로 나온 제품이 부루구루의 ‘아숙업 레몬스파클 하이볼’이다. 박상재 부루구루 대표는 “AI와의 대화를 통해 개발한 레몬스파클 하이볼은 한 시간 만에 기획된 제품”이라며 “세계 최초의 AI 기반 하이볼”이라고 소개했다.

앞서 대한제분과 함께 ‘곰표밀맥주’를 선보여 큰 성공을 거둔 수제맥주 스타트업 세븐브로이맥주. 이 회사는 대한제분과 상표권 계약이 만료된 뒤 지난 4월 말 새 브랜드 ‘대표밀맥주’를 선보였다. 약 6000만 캔이 팔려나간 곰표밀맥주 맛을 이어가기 위한 제품이다. 이름과 패키지만 바꾸고 맛과 내용물은 그대로 담았다. 대표밀맥주는 출시 한 달 만에 41만 캔 이상 판매되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대표골든에일, 대표라거(싱글몰트), 대표하이볼 등을 추가로 내놓을 계획”이라며 “변화하는 MZ세대 취향을 고려해 주류 신제품들을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카브루의 경복궁 맥주는 지난달 말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중소기업인대회 만찬주로 올랐다. 카브루 역시 최근 하이볼 제품을 잇따라 출시하고 있다. 3월 ‘이지 하이볼’을 시작으로 ‘레디 하이볼’ 등 캔 하이볼을 선보였다. 누구나 간편히 하이볼을 즐길 수 있도록 기획한 제품이다. 지역별 주류 스타트업 늘어전국 각지에서 신개념 맥주와 소주 등을 선보이는 주류 스타트업도 늘어나고 있다. 경북 안동의 청년 스타트업 이공이공은 수제맥주 ‘경화수월’을 출시했다. 70년 전통의 엿 공장에서 생산한 조청과 지역에서 재배한 푸룬(건자두)을 활용한 제품이다. 짙은 색을 지닌 벨기에 스타일 맥주로, 조청과 푸룬의 섬세하고 산뜻한 맛이 특징이다. 이공이공은 앞으로 봄, 여름, 가을(탈춤축제용), 겨울 맥주를 모두 개발할 계획이다.

울릉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로컬 맥주’도 있다. 울릉브루어리를 세운 정성훈 대표는 서울에서 거주하다 할머니가 살고 계신 울릉도로 돌아와 양조업에 뛰어들었다. 정 대표는 “맥주의 맛은 물이 좌우하는데 화산섬의 정화 기능과 청정 자연이 만난 울릉도는 맥주에 최적화된 곳”이라고 말했다.

‘박재범 소주’로 불리며 500만 병 이상 팔려나간 원소주는 지역 살리기에 도움을 주고 있다. 강원 원주에서 재배되는 ‘토토미’라는 쌀은 연간 1만3000t씩 생산되며 과잉 생산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원소주를 생산하는 원스피리츠가 토토미 쌀을 연 1만t씩 구입하면서 이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전통주 구독 플랫폼 술담화는 한국 고유의 술맛을 알리고 있다. 최근 푸드 커머스 플랫폼 윙잇과 제휴를 맺고 다양한 큐레이션 상품도 출시했다. 도수가 높은 증류주 ‘서울의 밤’을 깔끔함이 특징인 ‘고른 매콤낚지볶음’과 조합하는 등 다양한 묶음 상품을 선보였다. 술 유통도 혁신한다주류 유통 시장을 혁신하는 스타트업들도 있다. 데일리샷, 달리, 키햐 등은 스마트폰 앱 등 온라인으로 주류를 주문한 뒤 음식점·슈퍼마켓·편의점 등 오프라인 매장에서 수령하는 서비스를 선보였다. 데일리샷은 이용자와 제휴 매장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앱 다운로드는 100만 건 돌파를 앞두고 있고, 술 픽업 매장 수는 1700곳이 넘었다.

스타트업 달리는사람들이 운영하는 주류 주문 서비스 달리도 빠르게 성장 중이다. 스타트업 분석 플랫폼 혁신의숲에 따르면 서비스 개시 후 지금까지 월평균 트래픽 성장률은 22%에 이른다. 지난해 10월 서비스를 시작한 키햐의 성장세도 가파르다. 최근 3개월간 월평균 거래액이 25%씩 증가했다. 키햐는 젊은 여성 취향에 맞춘 다양한 주류 상품으로 차별화해 전체 고객 중 2030 여성이 38%가량을 차지한다. 박영욱 키햐 대표는 “저도수의 달콤한 맛이 특징인 사케와 와인 품목을 늘렸다”고 말했다. 맥주·와인 부산물 재활용도맥주 등을 제조하면서 생기는 부산물을 재활용하는 스타트업들도 있다. 푸드 리사이클링 스타트업 리하베스트는 맥주박(발효 전 단계에서 발생하는 찌꺼기)으로 밀가루 대체 원료인 ‘리너지’ 가루를 만들고 있다. 리너지는 ‘리(re)’와 ‘에너지(energy)’의 합성어로, 에너지를 다시 활용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민영준 리하베스트 대표는 “리너지 가루는 단백질과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칼로리는 낮다”며 “에너지바, 그래놀라, 프로틴볼과 같은 건강식을 선보였다”고 말했다.

스타트업 디캔트는 와인 퍼미스(포도를 으깬 뒤 발효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이물질)를 재활용하고 있다. 퍼미스에 와인보다 훨씬 많은 항산화물질이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 김상욱 디캔트 대표는 “퍼미스를 말린 뒤 균주를 넣어 재차 발효시키면 와인보다 40배 많은 항산화물질을 얻을 수 있다”며 “이를 이용해 화장품, 건강기능식품 등을 생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