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 어느새 초라해진 우리 아버지…그는 막다른 골목에 서 있었다

입력 2023-06-06 17:50
수정 2023-06-07 00:19

물건을 팔지 못하는 세일즈맨은 끝장이다. 실적을 요구하는 직장의 압박에 숨이 막히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감이 심장을 짓누른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은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어느 가장의 이야기다. 어리석어 보여도 미워할 수 없고 오히려 연민까지 불러일으키는 남편이고 아빠다.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최근 개막한 ‘세일즈맨의 죽음’은 미국 현대 희곡의 아버지로 꼽히는 극작가 아서 밀러의 작품이다. 1949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후 퓰리처상, 토니상 등을 휩쓴 걸작이다. 원로 배우 박근형(83)이 주인공을 맡아 약 7년 만에 연극계에 복귀해 화제가 됐다.

연극은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기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30년 넘게 세일즈맨으로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살아온 평범한 가장 윌리 로먼(박근형 분)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윌리는 젊은 시절 능력 있는 영업 사원에 존경받는 가장이었지만 나이가 들며 점차 초라해져 간다. 영업 실적이 떨어지면서 직장에서 입지가 좁아지고 아들들과의 사이도 어긋나버리고 만다.

100년 전 먼 나라 미국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지만 관객에게 충분히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보편성을 지녔다. 가장으로서 겪는 부담감과 무게감, 직장에서의 입지가 좁아지면서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듯한 모멸감 등은 시대와 국가를 관통하는 보편적 정서다. 극 중 큰아들인 비프와 윌리의 부자 갈등 역시 관객에게 공감을 느끼게 해준다.

배우 박근형은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며 환영과 환청에 시달리는 윌리 그 자체가 된 듯한 연기를 보여줬다. 윌리는 자꾸만 과거의 상황을 떠올리면서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세 시간 넘는 러닝타임의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하는 박근형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방대한 대사량을 너끈히 소화해낸다. 자신감 넘치는 젊은 아버지의 모습부터 말이 통하지 않는 고집불통 노인까지 분장 변화 없이 오직 개인의 역량으로 다채로운 모습을 표현했다.

마지막 부분에서 가족을 위해 윌리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보험금을 받으면 큰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란 안도감과 아들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의 기쁨, 죽음을 앞둔 두려움 등 복합적인 감정이 고스란히 박근형의 표정에 묻어나온다.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모습은 소름이 돋을 정도다.

밀러의 희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충실히 재현하려다 보니 때때로 극이 늘어지거나 지루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공연은 7일까지.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