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월의 밤과 날씨를 좋아한다. 하지를 앞둔 유월의 대기에 녹아있는 초여름 향기가 숨 쉴 때마다 폐부 가득 밀려든다. 파주 교하의 들엔 개구리 떼창이 울려 퍼지고, 나는 달랑 책 한 권 들고 동네 카페에 간다. 벚나무 그림자가 드리운 밤길을 걸어가며 살면서 괴로운 일도, 슬픈 일도 있었지만 머리 기대어 울 누군가의 어깨가 하나쯤 있다면 나는 잘못 살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카페는 집에서 멀지 않다. 일요일 텅 빈 카페에 나가 식량이 떨어진 저녁, 한대 지방에 사는 이들의 종교, 저장창고에서 썩어가는 향기로운 사과 더미들, 미풍의 사원과 협곡의 교회를 상상하거나 앞으로 쓸 12편의 산문, 이상의 ‘백구두와 스틱’, 앙리 마티스가 그토록 아끼던 ‘안락의자’ 등등을 막연하게 떠올려 보는 것이다. 날마다 카페에서 글 쓰는 작가들카페는 누군가에게는 취향 공동체, 누군가에게는 창작의 산실, 누군가에게는 연애의 장소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파리 시절의 헤밍웨이, 나탈리 사로트 같은 작가는 카페를 제 집필실 삼았던 이들이다. 나는 파리 생제르맹데프레의 ‘뒤 마고’에 나와 샹송 가수 그레코의 가사를 쓰고 사람들을 만나던 사르트르를 떠올린다. 1942년 무렵 사르트르는 모피 인조 코트를 걸친 채 카페 ‘플로르’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고 하루 네 시간씩 저 유명한 철학책 <존재와 무>를 썼다.
무명 작가로 젊은 시절을 파리에서 보낸 헤밍웨이는 난방이 안 되는 집에서 나와 카페 ‘클로즈리 데 리라’에서 토끼발 부적을 품은 채 연필 두 자루를 번갈아 가며 소설 초고를 수첩에 썼다. 작가인 나탈리 사로트는 수십 년 동안이나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번잡한 집에서 나와 오전 9시부터 낮 12시까지 집 근처 레바논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한 카페에서 소설을 썼다.
우리나라에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중반 무렵에 카페가 처음 생겼다. 주로 영화감독이나 배우들이 생계 방편으로 카페를 열었다. ‘다방 카카듀’(1927), ‘비너스’(1928), ‘멕시코’(1929), 그리고 이상의 ‘제비’(1933) 등등 카페가 문을 연다. 1932년 7월 7일 경성부청(현 서울도서관) 건너편 장곡천정(현 소공동) 105번지에 생긴 ‘낙랑파라’는 당대 모던 보이들에게 큰 화제였다.
이 카페는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나와 화신백화점 광고부 주임으로 일하던 이순석이 차린 ‘끽다점(喫茶店)’이다. 실내에 등나무 의자와 테이블이 있고, 군데군데 남국의 파초와 야자수 화분을 들이고, 벽에는 슈베르트와 독일 여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 같은 예술가 사진을 걸어놓는 등 이국 취향이 물씬한 ‘낙랑파라’에서는 커피와 홍차, 칼피스와 토스트 같은 식음료를 팔았다.
카페에는 낡은 예술의 껍질을 깨고 지각 변동을 일으킬 예술의 천재들이 모여들며 문전성시를 이룬다. 이상과 박태원 같은 ‘구인회’ 멤버나 화가 구본웅, 길진섭, 김용준 등이 모여 만든 ‘목일회’ 회원들이 단골이었다. 박태원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창백한 예술가들이 끽연을 하며 환담을 나누던 카페 풍경을 묘사한다. 카페 '낙랑파라'가 있던 그 시절“다방의 오후 2시, 일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그곳 등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이야기를 하고, 또 레코드를 들었다. 그들은 거의 다 젊은이들이었고, 그리고 그 젊은이들은 그 젊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기네들은 인생이 피로한 것 같이 느꼈다.”
이곳에서는 소규모 음악회나 전시회, 출판기념회나 ‘괴테의 밤’ ‘러시아 소설가 투르게네프 50주기 기념제’ 같은 행사가 열렸다. 제 커피값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아 늘 더치페이를 시전하던 이상이 이화여전 영문과 출신인 변동림과 만나 선본 곳도 ‘낙랑파라’였다. 몇 해 뒤 ‘낙랑파라’는 배우 김연실이 인수하고, 이순석은 해방 이듬해 서울미대 교수로 부임해 후학을 가르치다가 1970년에 정년퇴임한다.
나는 집에서 나와 카페에 간다. 날마다 카페에 가는 것은 내가 오늘보다 내일이 더 행복할 거라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원고를 들여다보며 퇴고하거나 책을 들고나와 읽는다. 둘 다 꾸준함과 인지적 인내가 필요한 일이다. 카페 음악이나 손님들의 말소리가 합쳐진 소음 속에서 나는 주로 랩톱을 펼치고 글쓰기 작업을 한다. 나는 랩톱의 자판을 무아지경으로 두드리는데 그 선율을 타고 내 상상력은 무한 확장한다. 실제로 2018년 반년 동안 날씨가 좋건 나쁘건 가리지 않고 날마다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 나와 하루 네 시간씩 <나를 살리는 글쓰기>란 책을 집필한 적이 있다. 밤이 밤인 줄 모른 채 걷는 사람들어른이 되면 마당이 있는 집에서 아이들을 기르며 모차르트 음악을 듣는 게 내 꿈의 전부였다. 정작 마당이 있는 집을 소유했을 때는 일에 시달리느라 여유를 갖지 못했다. 내 어딘가에 불행이 웅크렸던 탓에 나는 고요하지 못했고, 인류의 고매한 사상을 다 품은 듯했으나 내 삶은 졸렬하고 비루했다. 봄엔 목련나무에 흰 꽃송이가 터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여름 자두나무에는 자두 열매가 익어가고, 가을엔 대추나무 가지가 휠 정도로 대추가 가득 열렸는데, 나는 그 집에서 행복하지 못했다.
뒤늦게 모란과 작약을 키우듯 새끼들을 살뜰하게 키우지 못한 내 형편을 돌이켜보며 탄식한다. 급류 같은 세월 속에서 길을 잃고 허둥지둥하는 사이에 아이들은 제멋대로 자라나서 품 안을 떠났다. 한때의 짧은 환몽처럼 지나간 그 시절을 회상하면 내 마음은 쓸쓸해진다. 이제 카페가 문 닫을 시간이다. 카페 창밖으로 어둠이 밀려오는 걸 지켜보다가 책을 덮고 일어난다. 나는 카페를 등지고 어두워진 밤길을 걸어 돌아간다.
진실한 친구가 있다면 그를 붙잡고 꼭 묻고 싶었던 게 있다. 친구여 왜 인생의 진실은 지나간 뒤에야 알 수 있을까? 왜 후회 속에서만 참다운 인생의 길이 보이는 것일까? 그 대답을 해줄 친구는 지금 여기에 없다. 우리는 제각각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밤이 밤인 줄도 모른 채 불멸의 어둠 속을 건너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