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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의 단절보다 더 무서운 건 탈(脫)대만이다.”
최근 세계 빅테크(대형 기술기업)들의 당면 과제로 ‘대만 벗어나기’가 떠오른 가운데, 이를 실행할 경우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1일(현지시간) “중국과의 분리도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었지만, 대만과의 단절은 더 큰 후폭풍이 있을 것”이라며 “그 비용을 기꺼이 지불할 준비가 돼 있는 기업이 몇이나 있을지 의문”이라고 보도했다.
기업들이 대만과의 관계 축소를 고민하게 된 계기 중 하나로 지난해 8월 낸시 펠로시 당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이 꼽힌다. 중국이 대만 봉쇄 군사훈련 등으로 맞불을 놓으면서, 서방 기업들은 대만 비중을 축소하는 공급망 재편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게 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재임 시절 본격화한 미·중 갈등 때문에 공급망을 중국에서 대만으로 옮긴 기업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대만 사업을 축소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인텔, AMD, 메타, 구글, 아마존 등 미국 빅테크들은 지난해 중반부터 공급업체들에 “중국과 대만 이외의 지역에서 생산 능력을 확보할 방안을 검토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HP와 델은 더욱 구체적으로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능력을 구축하라”는 지시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델은 내년 안에 중국산 칩 생산을 단계적으로 축소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일본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 어드반테스트의 한 임원은 “우리는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공급망 중단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업무연속성계획(BCP)을 세워놨다”면서도 “하지만 대만해협에서 실제로 분쟁이 발생하면 솔직히 그 어떤 BCP도 무용지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는 대만 TSMC의 비메모리 반도체 칩 생산에 차질이 생길 경우 세계 전자기기 제조사의 매출 손실이 5000억달러(약 659조원)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미 연구기관 로듐그룹은 최근 “대만 관련 분쟁이 발생하면 2조달러 이상의 경제 활동이 순식간에 흔들릴 것”이라고 밝혔다.
대만 전자기기 업체 콤팔의 한 고위급 임원은 “사람들은 글로벌 공급망에서 대만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과소평가하는 것 같다”며 “반도체 칩뿐 아니라 인쇄회로기판, 렌즈, 케이스, 각종 전자부품에다 그 조립 과정에 이르기까지 대만의 역할은 엄청나다”고 말했다.
그는 “대만이 뚫리면 세계 공급망 전체가 일시 마비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콤팔은 HP, 애플 등의 주요 공급사다. 대만의 한 애플 협력업체 임원은 “이제 동남아와 인도로 생산설비 이전을 가속화해야 한다”고 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