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5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 유족들은 의료계에 1조원을 기부했다. 이 중 7000억원은 감염병전문병원 건립을 위해 국립중앙의료원에, 3000억원은 소아 환자를 위해 서울대어린이병원에 각각 전달됐다.
고인의 ‘따뜻한 유산’으로 아픈 아이 누구나 선진국형 맞춤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021년 5월 고인의 기부금으로 출범한 소아암·희귀질환극복사업단이 백혈병 환자 대상 유전자 검사비 지원 사업에 나서면서다.
소아암·희귀질환극복사업단은 31일 전국 소아청소년 백혈병 환자들이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NGS) 검사를 무료로 받도록 지원하는 사업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강형진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의미 있는 기부금 덕에 NGS 기반 유전체 검사를 통해 치료를 결정하고 예후(결과)를 예측할 수 있게 됐다”며 “전국 소아백혈병 환자의 치료 부작용을 예측하고 이를 최소화할 기회가 생겼다”고 했다.
국내에선 매년 1000~1200명의 소아청소년이 암 진단을 받는다. 이 중 30%는 급성백혈병 환자다. 과거엔 암으로 세상을 일찍 떠나는 아이가 많았지만 최근엔 유전체 분석 기반 정밀의료 기술이 발전하면서 80% 넘게 완치된다.
이런 정밀의료에 필요한 검사가 NGS다. 백혈병 환자 골수나 혈액 등을 통해 세포 속의 수많은 유전자를 한꺼번에 분석할 수 있다. 하지만 검사 비용이 200만원을 넘는 데다 건강보험 지원을 받아도 환자가 전체 비용의 절반 이상을 내야 해 부담이 컸다.
사업단이 NGS 검사비 지원을 시작하면서 연간 400명의 환자가 무료로 검사받을 수 있게 됐다. 전국 환자들이 혜택받을 수 있도록 각지에서 환자 검체를 채취해 중앙검사기관에 보내면 결과를 분석하는 시스템도 갖췄다. 강 교수는 “장기적으로 국내 모든 소아청소년 암에 정밀의료 기반 치료를 확대 지원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3개 사업부로 구성된 사업단에서 1500억원을 배정받은 소아암사업부가 NGS 검사 사업을 진행한다. 희귀질환사업부는 600억원의 기부금을 활용해 지난해 5월부터 희귀질환이 있는 아이와 부모의 유전체를 분석해 원인 유전자를 찾는 전장엑솜분석(WES) 검사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1년 만에 전국 445명의 어린이 환자와 853명의 가족 등 1298명이 혜택을 받았다. 이를 통해 원인 모를 질환으로 10년 넘게 고통받던 아이들이 질환 원인을 알고 치료받을 수 있게 됐다.
어른용 의약품에 비해 ‘돈이 되지 않아’ 개발이 잘 이뤄지지 않는 어린이용 치료제 개발 연구 등을 지원하는 공동연구사업에도 625억원이 활용되고 있다. 2021년부터 어린이용 수술 및 신약 개발 등 105건 사업을 지원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