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두우, 헷, 넷…아헛, 여얼.”
지난 29일 서울 마포구 애오개역 인근 제이에스오페라단 연습실에서 청년 9명이 다소 뭉개진 발음으로 숫자를 하나부터 열까지 셌다. 악어처럼 턱을 위아래로 벌린 채 소리를 내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발성법을 가르치는 이재성 강사(58)는 “입을 제대로 안 벌리면 성대가 상할 수 있어요!”라고 외치며 이들을 독려했다.
평범한 노래 수업 같아 보이지만 참가한 20~30대 청년 9명은 모두 같은 아픔을 공유한 사이다. 이들은 오랜 시간 방에서 나오지 않고 은둔·고립생활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취직·진학 실패 등에 위축한국 사회는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다. 몸 또는 마음에 장애가 있어서, 소득이 적어서, 역량이 부족해서 등 다양한 이유로 ‘미션’을 완료하지 못했다고 느끼는 이들은 설 자리가 마땅치 않다. 서울에선 전체 청년(19~39세) 중 4.5%(고립 3.3%, 은둔 1.2%)에 해당하는 12만9000여 명이 은둔 및 고립생활을 하는 것으로 추정(서울시 2022년 12월 통계)된다. 이들이 다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여러 프로그램이 생겨나는 배경이다.
이날 열린 ‘8주의 기적, 한국형 발성법’ 수업은 서울시가 사단법인 씨즈와 손잡고 ‘청년의 자립을 위한 작은 학교’라는 콘셉트로 진행 중인 은둔·고립 청년 지원사업 ‘두두학당’의 일환이다. 이 학당에선 서각·오카리나·공예·보드게임 등 동아리 모임 11개를 열고 있다. 이 중 9개는 은평구 평생학습관에서 청년과 노인들이 어울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김모씨(26)는 “누구나 노래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지 않느냐”고 용기를 낸 배경을 설명했다. 참여 청년들은 8주간 매주 한 번 모여 2시간씩 호흡법을 배우고 노래를 연습한다. 마지막 주에는 가족과 지인들 앞에서 공연도 할 계획이다. “눈치 보지 말고 소리 치자”이날 청년들은 복부 횡격막 근육을 사용해 공기를 내뱉는 연습을 했다. 이재성 강사는 박모씨(32)가 힘을 제대로 못 주자 박씨의 배꼽 부분을 두 팔로 감싸 안은 채 힘껏 잡아당겼다. 박씨에게서 더 크고 맑은 소리가 나오자 다른 청년들 사이에서 “우와” 감탄이 흘러나왔다. 박씨는 “태어나서 지금껏 내본 소리 중 가장 큰 소리였던 것 같다”며 멋쩍어했다.
참가자들의 목표는 저마다 다르다. 희귀병(크론병)을 앓아 고등학교 졸업 후 10년 넘게 은둔생활을 했다는 박씨는 평소 내보지 못한 높은 음을 내보고 싶다고 했다. “가족과도 관계를 맺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는 이모씨(25)는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서서 노래를 해보는 게 목표라고 했다. 반장 최모씨(29)는 “위축돼 있던 사람들이 이곳에서만큼은 눈치 안 보고 큰 소리를 지를 수 있어서 다들 쾌감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새출발할 수 있도록 보듬어야”은둔·고립 경험을 하게 되는 배경은 다양하다. 서울시의 작년 말 은둔·고립청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이들이 외톨이가 되는 첫 번째 계기는 사회생활 진입 실패(실직하거나 취업에 어려움을 겪어서·45.5%)다. 이어 ‘심리적 또는 정신적인 어려움’(40.9%), ‘타인과 대화하거나 함께 활동하는 등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어려워서’(40.3%), ‘집 밖에 나가는 게 귀찮아서’(39.9%) 순이었다.
오쿠사 미노루 씨즈 고립청년지원팀장은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들은 사회에 적응을 못 한 게 아니라 사람을 능력으로 판단하고 비하하며 배제하는 주변의 시선과 기대에 지나치게 적응(과적응)한 것이 문제인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대응책을 마련하는 곳도 하나둘씩 나오고 있다. 광주광역시는 2019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은둔형 외톨이 지원 조례’를 제정했다. 지난 4월엔 서울시가 은둔고립 청년 지원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오쿠사 팀장은 “청년들을 품어주고 다시 출발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최해련 기자 haery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