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밖에 쓸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너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1990년 즈음 어느 날 ‘한국 현대문학의 거목’ 박완서 선생(1931~2011)은 맏딸 호원숙 작가(69)를 앉혀놓고 부탁했다. 자신의 연대기를 좀 써달라고 했다. 당시 웅진닷컴출판사는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가를 추려 ‘문학앨범’ 시리즈를 내고 있었다. <나목> <그 여자네 집>으로 문단과 독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박 선생도 당연히 시리즈 대상이었다. 박 선생은 딸이 정리해준 육십 평생을 ‘박완서 문학앨범’에 담을 생각이었다.
엄마의 부탁에 호 작가는 오랜만에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잡지 ‘뿌리 깊은 나무’의 편집기자로 일하다가 육아와 살림을 위해 펜을 내려놨다. 다시 글을 쓰려니 쉽지 않았지만 엄마 말처럼 도저히 남에게 맡길 수가 없었다. 200자 원고지 첫 장을 쓰는 데만 한 달이 걸렸다. 그렇게 완성한 글이 ‘행복한 예술가의 초상’이었다. 딸이 엄마를 위해 준비한 가장 정성스러운 찬사이자 수필가로서 호원숙의 데뷔작이었다.
호 작가는 “글을 처음 쓰게 된 계기도, 이제껏 글을 꾸준히 쓸 수 있었던 동력도 모두 어머니”라며 “글을 쓰면서 나만이 가진 언어의 리듬을 발견했고, 나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됐다”고 했다.
최근 산문집 <아치울의 리듬>을 출간한 호 작가를 경기 구리 아치울마을 자택 ‘노란집’에서 만났다. 노란색 페인트로 외벽을 칠한 3층짜리 주택은 박 선생이 아파트 생활을 접고 1998년 지은 집이다. 박 선생의 소설집 <노란집> 덕분에 노란집으로 불린다. 호 작가는 “노란집에서 바라본 것들이 영감을 줬고 아름다웠으므로 그때그때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봄을 맞은 마당에는 철쭉이 한창이었고 살구와 앵두가 익어가는 중이었다. 201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박 선생이 머물며 집필활동을 한 이곳에서 이제는 호 작가가 자신과 자연의 리듬을 글로 쓴다. “그의 글은 수수하고 지혜롭다”는 이해인 수녀의 평처럼 아치울의 풍경을 아늑하게 그려낸다. “거실에 해가 깊이 들어와서 저절로 손님 대접이 된다.” 이런 문장은 노란집에 가보지 못한 사람도 이곳의 햇살을 짐작하게 한다.
그는 “이곳에서 아직도 매일 어머니를 새롭게 발견한다”고 말했다. 책장에서 미처 발표하지 못한 어머니의 글을 마주하는 건 물론, 이미 읽은 어머니의 글도 시간이 지나면서 새롭게 다가온다. “어머니는 예지적인 분이었기 때문에 작품을 읽을 때면 마치 지금을 미리 내다본 듯한 지혜와 서늘함을 느끼곤 한다”고 했다.
호 작가는 2011년 박 선생이 타계한 후에는 박 선생의 기록을 정리하고 저작권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다. 어머니를 재발견하는 동시에 지켜야 하는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맥락 없이 글을 짜깁기하거나 출처가 불분명한 인터넷 글을 읽는 대신에 원문을 읽어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호 작가는 지금껏 어머니와 그의 글을 자양분으로 삼아 글을 써왔지만, 이번 책을 내게 된 계기는 엄마가 아니라 손녀딸이다. 미국 뉴욕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손녀딸이 미술 시간에 그린 팬데믹 시대의 자화상으로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아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그림을 걸게 된 것이다.
손녀딸은 그림 아래에 이렇게 적었다. “할머니의 책을 위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녀는 작가다.” 어머니를 기록하려 글을 써온 호 작가가 이제는 손녀딸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는 동력이 된 셈이다. 호 작가는 친구들과 모인 인터넷 카페에 틈틈이 써 올렸던 글, 친구를 향한 편지 등을 책으로 묶어내면서 손녀딸이 그린 그림을 삽화로 실었다.
“어려서부터 학교 끝나고 화랑에 가는 걸 참 좋아했다”는 호 작가는 어머니 타계 후 틈틈이 그림을 그려왔다. 이번 책 표지를 장식한 그림도 호 작가가 파스텔로 그린 추상화다. 다음 책은 그림에 대한 책이 될까. 그는 그의 글처럼 단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는 또 모르죠. 나는 똑같은 일만 고집하는 건 안 좋아하거든요. 나는 요새 그림이든, 글이든 어떻게 새로운 걸 또 해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이제 늙었으니까 조심조심 살살.”(웃음)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