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요금 인상하는데…전기 남아돈다는 이 나라 [글로벌 핫이슈]

입력 2023-05-30 06:00
수정 2023-05-30 17:39
핀란드의 전력 판매 가격이 생산 비용을 밑돈 것으로 나타났다. 빙하 유출수가 불어나며 수력발전량이 급격히 증가해서다. 유럽 최대 원자력발전소인 올킬루오토 3(OL3)을 가동하며 총 공급량이 증가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전력 가격 '0' 유로 찍어29일(현지시간) 핀란드 현지 매체 일탈레흐티에 따르면 핀란드 전력거래소 노드 풀(Nord-Pool)에서 전날 전기 현물가격이 0유로를 찍었다. 28일 오후 8시께 수요가 늘어나며 전기 현물가격은 KWh(킬로와트시) 당 1.2유로로 상승했다.

핀란드 국영 송전업체 핀 그리드의 최고경영자(CEO)인 유카 류수넨은 "가격 변동이 이례적인 상황에 부닥쳤다"라며 "핀란드 내 전력이 과잉 생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제 전력 공급자가 전기를 생산할 때 비용을 내야 할 판이다"라고 덧붙였다.


핀란드 전력 현물가격이 0유로 밑으로 떨어진 건 지난 24일에 이어 두 번째다. 당시에도 전력 생산량이 수요를 초과하며 전력 현물가격이 큰 폭으로 내려갔다. 이날 전력 현물 최고가는 kWh당 0.3유로에 불과했다.

핀란드 전기 공급량이 급격히 증가한 배경엔 봄 홍수가 있다. 기온이 따뜻해지며 스칸디나비아반도 빙하가 녹아 빙하 유출수가 급격히 불어났다. 수위가 높아지자 수력 발전량도 큰 폭으로 증가했다. 발전량을 통제하기 어려운 수력발전 특성 때문에 공급 과잉 현상이 나타났다는 분석이다.

지난 4월 가동을 시작한 신규 원자력발전소 올킬루오토 3 때문에 전기 공급량이 크게 늘었다는 관측이다. 전기 요금이 급격히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올킬루오토 3 운영사인 테올리수덴보이마(TVO)는 긴급회의를 열고 전력 생산량을 단기간 감축하기로 결정했다.

얀 카우피 핀란드 에너지산업 협회 고문은 "전력 가격이 내려가 원전 발전량을 줄인 건 굉장히 이례적이다"라며 "핀란드 전력 가격이 음수(-)값을 기록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원전 신축으로 발전량 급증핀란드의 다섯 번째 원자력발전소인 올킬루오토 3(OL3)은 지난달 15일 가동을 시작했다. 시간당 발전량이 1600메가와트(MW)에 달하는 초대형 원자로다. 유럽에서 가장 큰 원자력발전소이자 세계 3위 규모다. 핀란드 전체 전력의 14%가량을 담당한다.


올킬루오토 3은 착공부터 가동까지 총 18년이 걸렸다. 2005년 착공했지만 건설 단계에서 기술적 결함이 발견돼 4년여간 공사가 중단됐다.

공사가 지연되면서 초기 투자 비용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일정상 차질이 발생하자 초과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이냐를 두고 법적 분쟁이 벌어졌다. 원전 건설에 참여한 독일 지멘스와 아레바 컨소시엄은 TVO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지연에 대한 보상금으로 35억유로를 지급하라는 주장이었다.

소송이 장기화하면서 출혈 경쟁이 벌어지자 양측은 국제상공회의소(ICC)의 중재에 따라 2018년 극적으로 합의했다. TVO가 지멘스 컨소시엄에 4억 5000만유로 보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이 붙었다.

공사가 재개됐지만 오랜 기간 중단된 탓에 기술적 결함이 잇따르며 시운전 일정이 미뤄졌다. 코로나19까지 창궐하며 연료 적재 및 터빈 검사가 연기됐다. 10번 이상 일정이 변경됐지만, 설비 테스트를 마무리한 끝에 2023년 3월 시운전에 성공했다.

TVO는 성명서를 통해 "OL3로 인해 러시아로부터의 에너지 수입 의존도를 낮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앞으로 60년간 핀란드의 에너지 발전을 책임질 것"이라고 발표했다. 원전 지지율 65% 핀란드의 원자력발전 규모가 급증한 배경에는 원전에 친화적인 여론이 있다. 독일을 중심으로 탈(脫)원전 기조가 유럽을 휩쓰는 가운데 핀란드에선 원자력 발전을 확대하는 데 국민 60%이상이 찬성했다. 에너지 안보를 지키기 위해 원자력발전이 필수라는 판단에서다.


핀란드의 1인당 연간 전력 소비량은 세계 5위권 안에 드는 에너지 과소비 국가다. 핀란드의 2020년 1인당 전력 소비량은 1만 5804kWh로 세계 3위를 차지했다. 겨울이 다른 지역에 비해 긴 탓에 난방 수요가 큰 탓이다. 국내총생산(GDP)에서 중공업 비중(31% 수준)도 커서 에너지 수요가 컸다.


에너지 수요를 맞추기 위해 전적으로 러시아에 의존했다. 매년 천연가스 소비량의 84%가량을 러시아에서 수입했다. 원유와 석탄도 대부분 러시아산이었다. 2019년 핀란드 에너지 소비량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30%에 육박했다.

하지만 지난해 러시아가 천연가스를 무기화하자 에너지 위기에 대한 우려가 증폭됐다. 지난해 5월 칸타퍼블릭이 핀란드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원자력 발전을 늘리는 데 찬성하는 응답률은 65%에 달했다. 원자력발전을 줄여야 한다는 답변은 10% 안팎이었다. 러시아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원전을 지어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4월 총선에서도 원자력발전을 미래 에너지원으로 삼아야 한다고 촉구해 온 중도우파 성향의 국민연합당(NCP)이 원내 1당으로 등극했다. 녹색당도 인정한 신재생에너지탄소 배출량을 감축하기 위한 혁신적인 시도라는 평가도 나온다. 2016년 핀란드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연간 8.6t에 육박했다. 유엔이 1인당 2t까지 제한할 것을 핀란드 정부에 권고하기까지 했다.

재생 에너지를 고려했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화석연료를 대체하기 위해 태양광·풍력 발전소를 급격히 늘릴 수 없는 환경이라서다. 풍력발전소를 택하기엔 바람이 부족하고, 자연을 파괴하면서 댐을 건설할 수 없다는 반대 여론이 거셌다. 남은 대안은 원자력발전뿐이었다.

2017년 탈(脫)원전을 당정으로 내세웠던 핀란드 녹색당도 성명서를 통해 원전 확대에 동의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탄소 배출을 감축하는 게 더 시급하다는 이유에서다.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기 위해선 원전을 더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적극적으로 원자력발전소를 늘리면서 전력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늘었다. 2021년 핀란드는 전력 발전에서 원자력발전이 차지하는 비중을 33%까지 끌어올렸다. 화석연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36%까지 낮췄다. 국제에너지기구(IEA) 회원국 평균인 70%를 크게 밑돈다.

핀란드 정부는 원자력 발전 비중을 2025년까지 40% 이상 확대할 계획이다. 올킬루오토 1,2호 사용 연한을 연장을 추진하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 인근에는 대규모 고준위 방폐장도 건설하고 있다. 2025년 완공이 목표다. 가동에 성공하게 되면 세계 최초로 사용후핵연료 영구 처분시설을 구축하게 된다.

IEA는 "핀란드는 GDP 대비 에너지 R&D 예산 비율이 회원국 중 4위에 달할 정도로 에너지 전환에 주력했다"며 "원자력발전 부문에서 핀란드가 글로벌 리더로 부상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