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길' 걷는 에르도안…경제 파탄 우려에 리라화 곤두박질

입력 2023-05-29 18:25
수정 2023-06-28 00:01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28일(현지시간) 결선 투표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대선에서 승리해 재선에 성공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번 재선으로 2003년 첫 집권 이후 2033년까지 최장 30년에 달하는 사실상의 종신집권에 도전할 수 있게 됐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포퓰리즘 경제정책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미국 달러화당 터키 리라화 환율은 20리라까지 치솟았다. 터키를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도 더욱 복잡해졌다. 친러 행보를 보여온 에르도안 대통령의 재선으로 러시아는 안도하게 됐다. 반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내 이단아로 행동해온 에르도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함으로써 미국과 서방은 튀르키예와 불편한 동거를 계속해야 할 형편이다. 결선 투표서 철옹성 재확인28일(현지시간) 치러진 결선 투표 결과 튀르키예 최고선거위원회(YSK)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승리를 선언했다. 투표함 약 99%가 개표된 가운데 에르도안 대통령은 52%를, 경쟁자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공화인민당(CHP) 대표는 48%를 얻었다. 최종 집계 결과는 다음달 1일 발표될 예정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17년 개헌을 통해 사실상 종신 집권의 기반을 마련했다. 기존 헌법으로는 대통령 연임이 한 번만 가능해 에르도안의 임기는 2019년 끝나야 했다. 하지만 새 헌법에 따라 치러지는 ‘첫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 기존 임기를 집계하지 않도록 했다.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실시해 승리하면 추가 5년 임기를 보장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2029년까지 집권이 가능하게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00년 대통령에 당선된 뒤 편법으로 총리와 대통령을 번갈아 맡은 사례를 따른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선거 전 여론조사에선 에르도안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에게 5% 이상 뒤졌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지난 2월엔 남동부 지역에서 규모 7.8의 강진으로 5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재난까지 잇따라서다. 그동안 탄압받아온 쿠르드족 유권자 역시 야당을 지지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은 선거 닷새 전 공공부문 최저임금을 45% 인상하고 전 국민 천연가스 한 달 무료 공급 등 승부수를 던져 판을 뒤집었다. 경제 상황 악화 우려 에르도안의 집권 연장으로 튀르키예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날 선거 결과가 전해지자 리라화 환율이 장중 달러당 20리라를 돌파하기도 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환율 급등으로 인한 물가 상승 우려에도 ‘서민들의 이자 부담을 줄이고 경기를 활성화하겠다’며 기준금리를 오히려 내린 통화정책으로 유명하다. 그 결과 튀르키예는 지난해 물가상승률(연간)이 72.3%에 달했고 지난달에도 물가상승률(전년 같은 달 대비)이 43.7%를 기록할 정도로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상황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재집권으로 이 같은 ‘비정통적’ 경제정책은 유지될 전망이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에르도안 대통령을 두고 ‘포퓰리즘의 술탄’이라고 꼬집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당선으로 러시아 등 권위주의 정권과 미국을 위시한 서방 진영의 엇갈린 속내도 드러났다. 튀르키예가 NATO 동맹의 일원이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등 미국 및 서방과 종종 갈등을 겪어와서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는 등 친러시아 행보를 보여왔다.

타스·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이날 에르도안 대통령의 재선이 확실시되자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전하며 에르도안 대통령을 ‘친애하는 친구여’라고 호칭해 각별한 친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트위터에 짧게 축하 메시지를 올리며 NATO 동맹으로서 협력을 강조했다.

이스탄불증시는 이날 개장 직후 4%가량 상승했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제거되자 현지 투자자 수요가 커진 것이다. 리라화가 불안정한 탓에 이스탄불증시에서 외국인 투자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작은 편이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