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필기구를 셔츠 주머니에 꽂았다. 양복주머니에서 꺼내면 늦어진다는 이유에서다. 메모는 생각이 퍼뜩 날 때 바로 적어야 한다고 했다. 때로 거꾸로 꽂은 볼펜에서 새 나온 잉크로 옷을 망치기도 해 어머니 잔소리를 들어도 고치지 못했다. 필기구 꽂은 셔츠 주머니가 해져 덧대기도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필기구도 그렇지만 메모지도 닥치는 대로 썼다. 잠에서 깨면 주머니마다 구겨 넣은 메모지를 꺼내 다급하게 휘갈겨 쓴 난필을 해독하며 잡기장에 옮겨적는 게 아버지의 평생 중요한 아침일과였다.
휴가 나왔다가 귀대 인사하러 회사로 찾아갔을 때 아버지는 회의 주재 중이었다. 비서가 중간에 보고하자 회의실에 들어오라 했다. 직원들 발언을 아버지는 언제나 그랬듯이 메모했다. 30분 정도 더 지나 회의가 끝날 무렵 아버지는 그날 회의 결론을 지었다. 아버지는 쓰던 메모지를 참석자에게 돌려 모두 자기 이름을 쓰고 서명하라고 했다. 내가 의아해하자 전무가 “사장님은 중요한 회의 때는 꼭 저렇게 메모하고 참석자 사인을 받아 바로 품의하라”고 지시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더 고칠 것도 없어요. 저걸 결재판에 끼우고 정서해서 올리면 바로 결재 나고 시행에 들어가니까요”라고 보충설명도 했다.
모두 나가자 아버지가 덧붙인 말이다. “전달되어야 말이다. 전달되지 못한 말은 소리일 뿐이다. 전달되지 못한 말은 말한 사람의 책임이 더 크다. 말 잘한다는 건 내용도 중요하지만, 상대가 다 알아듣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다.” 젊은 시절부터 훈련받아 대중연설에 익숙한 아버지는 “1분 넘어가는 메시지는 메시지가 아니다”라면서 “사람들은 네 말에 1분 이상 귀 기울이지 않는다. 열 명이 들으면 두 명만 집중한다. 들은 사람도 25%만 제대로 듣는다. 그러니 네 말을 들은 사람이 다른 네 사람에게 전달하면 네가 한 말은 없어진다”고 했다. 아버지는 회의록을 만들어 사인을 받는 특이한 회의 기술을 그렇게 설명했다.
그날 말씀하신 고사성어가 ‘둔필승총(鈍筆勝聰)’이다. ‘둔한 기록이 총명한 머리보다 낫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천재의 기억력보다 둔재의 메모가 낫다”라는 이 말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즐겨 썼다고 했다. 다산은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을 즉시 기록해 두는 ‘수사차록법(隨思箚錄法)’을 썼다. 그가 18년 유배 기간 500여 권에 이르는 위대한 저작을 남길 수 있었던 데는 방대한 메모가 밑거름됐다. 아버지는 “부지런히 기록해야 생각도 건실해진다. 메모는 생각의 실마리와 기억을 복원한다. 본능적으로 써라”라고 당부했다.
아버지는 “말의 전달력은 말로 네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능력이다. 전달력이 뛰어난 사람은 자기 생각을 명확하고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어 듣는 사람의 관심을 끌고 설득할 수 있다”라고 했다. 실제로 미국의 심리학자 메라비언은 메시지 전달에 있어 자세, 태도, 표정 등 비언어적 요소가 무려 55%를 차지하고, 음성, 억양 등 목소리가 38%, 말은 단지 7%만 차지한다고 했다. 비언어적 요소가 말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총명함에 기대지 마라. 듣는이들을 원망하지 마라. 말은 단순히 소리가 아니라,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거다. 말은 듣는 사람에게 이해되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 말을 해도 듣는 이가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말의 전달력의 생명은 명료성이다. 그걸 담보하는 게 기록이다. 전달력을 높이는 연습을 꾸준히 하라”라고 그날 말씀을 맺었다.
IMF 외환 위기 시절 뉴욕에서 근무할 때 미국인들과 하는 회의는 고역이었다. 알고 보면 별 거 없는 말도 책임감으로 긴장이 겹치면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알아들은 대로 적어 회의 끝나고 이렇게 말한 게 맞냐며 사인하라고 하자 모두 제대로 고쳤다. 다음 회의부터는 그들이 할 말만 했다. 기록이 말의 전달력을 끌어올린 결과다. 손주들이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 반드시 분명한 전달력을 갖추게 훈련시켜야 할 습성이다. 굳어지면 고치기가 배우기보다 더 어려운 게 말버릇이기 때문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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