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美·中보다 무서운 놈이 나타났다

입력 2023-05-17 18:33
수정 2023-05-18 00:26
“과거 어느 세기가 예감이나 할 수 있었는가.” “경탄할 만한 예술을 창조해냈다.” “그 이전의 모든 시대와 구별해준다.” “새로 생겨나는 모든 것조차 미처 자리를 잡기도 전에 이미 낡은 것이 되고 만다.” <공산당 선언(1848년)>에 나오는 대목들이다. 당시 부르주아에 대한 이 표현들을 지금 초거대 인공지능(AI) 언어모델(LLM)에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오픈AI의 챗GPT 공세에 맞서 구글의 반격이 본격화됐다. 챗GPT와 구글 바드(Bard)의 비교가 쏟아지는 가운데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게 있다. 바드가 영어 외 언어로 한국어를 우선 지원한 점이다. 상대를 알지 못하면 경쟁을 하든 협력을 하든 번지수를 잘못 찾기 십상이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로움이 없을 것이고, 상대도 모르고 나도 모르면 반드시 위태롭다”는 손자병법까지 소환해야 할 지경이다.

순다르 피차이 구글 최고경영자(CEO)는 “기술 수용도(피드백)가 빠른 한국은 시장 가치가 크다”고 했다. 더없이 좋은 테스트베드란 뜻이다. 실제로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데이터 가용성 측면에서 비영어권 국가 중 구글의 안드로이드 점유율이나 검색 점유율이 높은 국가를 먼저 골랐을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다른 한편으로는 구글의 전략적·의도적 배치란 해석도 가능하다. 미국 중국 러시아를 빼면 독자 검색엔진을 가진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다. 구글이 중국 러시아는 어차피 못 들어간다고 계산한다면 나머지 세계의 통일이 달성되는 것이다.

구글 바드의 한국어 출시가 다음 타깃 시장의 예고라면 당장 네이버 등 정보기술(IT) 기업이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검색시장은 물론이고 연관 서비스도 영향이 불가피하다. 네이버가 대항마로 예고한 하이퍼클로바X가 챗GPT와 바드에 비해 한국어에서 더 좋은 성능을 보여도 투자 대비 수익은 또 다른 문제다. 한국이 그저 기술 수용국으로 전락하면 데이터 주권이나 빅테크 규제법을 외치는 것 말곤 대응 수단이 없는 유럽연합(EU)과 같은 처지로 내몰리고 만다. EU는 거대한 시장이라도 레버리지로 삼을 수 있지만 한국은 그것도 아니다.

초거대 AI 언어모델을 대화형 서비스로만 볼 수 없다는 점을 간파한 다른 업종 기업도 깊은 고민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하노버 메세 2023에서 나타난 독일의 몸부림은 남의 얘기가 아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전략적 자율성’을 갖겠다는 독일은 자동차 등 주요 업종에서 ‘데이터스페이스’ 전략을 추진 중이다. 얼마나 먹힐지는 아직 모른다. 장영재 KAIST 교수는 “빅테크의 초거대 AI 모델이 이미지 영상 등 멀티모달로 확장되고 로봇과 결합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한국 산업에 최대 위협”이라고 했다. 미국이 제조로 돌아오고 있는 상황에서 빅테크가 산업 데이터까지 넘보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는 경고다.

게임체인저 기술이 무서운 이유는 교과서에 나오는 마이클 포터의 경쟁력 분석 모델을 통째로 무력화해버리기 때문이다. 업종 불문하고 모든 기업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AI 언어모델 GPT(Generative Pre-traind Transformer)가 증기기관, 전기, 인터넷처럼 산업혁명의 역사를 바꾸는 ‘판갈이 기술’ GPT(General Purpose Techniology)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구경만 하다간 앉아서 죽게 생겼다.

‘한·미·일 분업 구도냐 중국이냐’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지만, 훨씬 무서운 놈이 나타났다. 한국이 미·중 충돌 구도에 함몰돼 있을 때가 아니다. 정부가 강대국 산업정책의 종속변수로 끌려다니다가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타이밍을 놓치면 상상하기 어려운 대가가 돌아올지 모른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로버트 기요사키는 개인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종업원(employee), 자영업자(self-employed), 비즈니스 오너(business owner), 투자자(investor)다. 앞의 두 가지가 자신이 일해서 먹고사는 쪽이라면, 뒤의 두 가지는 남을 일하게 해서 돈을 버는 쪽이다. 기업도 국가도 다를 게 없다. 빅테크의 플랫폼 장악, 패권국의 통제권 강화엔 다 이유가 있다. 생산성 혁명의 기회가 찾아왔지만 어느 쪽으로 가느냐에 따라 산업지도의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