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차에 깔려 죽는 사고가 터졌다. 초등학교 6학년 때다. 학교에 붙여 지은 새집에 이삿짐을 내린 트럭이 운동장에 주차해 있었다. 점심시간에 같은 반 아이들이 차에 올라가고 매달리며 놀았다. 그중 한 아이가 운전석에 올라가 시동을 걸자 차가 후진했다. 내 친구가 차 밑에 떨어진 검정 고무신을 꺼내러 들어갔다가 깔리는 사고를 당했다. 집에서 점심 먹다 비보를 듣고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틈으로 죽은 친구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였다. 트럭 바퀴에 머리가 깔리는 참사였다. 가족들이 달려와 혼절하고 학생들은 모두 울었다.
가족과 마을 청년들은 운전한 학생과 담임선생님을 찾으러 동네를 뒤지고 다녔다. 나는 학교와 집을 몇 번이나 오가며 우두망찰했다. 해가 넘어갈 즈음에 아버지가 죽은 아이 아버지를 모셔오라고 했다. 멈칫거리자 아버지는 크게 호통치며 발길을 재촉했다. 사고 현장에 갔을 때 내 친구 시신은 거적에 덮여 그 자리에 있었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흩어졌다. 친구 아버지에게 말씀을 전하자 바로 따라나섰다. 아버지는 친구 아버지를 반갑게 맞아 방에서 낯선 사람들과 한참을 얘기했다. 방문이 열리며 “조 선생님 말씀처럼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겁니다”라고 처음 본 사람이 친구 아버지에게 말을 건네며 악수했다. 학교에 다시 갔을 땐 횃불이 밝혀지고 장례절차가 진행됐다. 인척인 담임선생님은 김칫독을 묻어둔 우리집 김치 광에 숨어 하룻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홀연히 잠들었을 때 죽은 친구가 꿈에 나타나 뭐라 말을 해 나는 애써 도망쳤다. 어머니가 흔들어 깨우자 아버지가 잠 덜 깬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친구가 얘기할 게 있다는 데 도망치는 놈이 어딨느냐”고 야단친 아버지는 “귀신하고라도 얘기 못 할 게 뭐냐? 뭔 얘기인지는 들어 봐얄 거 아니냐?”라며 심하게 나무랐다. 관계자들을 모아 사고수습대책회의를 마친 그날 밤 아버지는 “상대에게서 네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그가 너에게 그것을 줄 이유를 먼저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했다. 훗날에도 같은 말씀을 여러 번 하셔서 기억이 새롭다.
그날도 고사성어를 어김없이 인용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다.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라는 말이다. 맹자(孟子)의 이루(離婁) 편에 나온다. 이루는 ‘눈이 밝아서 백 보 밖에서도 능히 털끝을 살핀다’는 사람이다. 맹자는 “우와 후직, 안회는 모두 같은 길을 가는 사람으로 서로의 처지가 바뀌었더라도 모두 같게 행동했을 것[禹稷顔回同道 禹稷顔子易地則皆然]”이라고 평했다. 우(禹)는 하(夏)나라의 시조로 치수(治水)에 성공한 인물이고 후직(后稷)은 순(舜)이 나라를 다스릴 때 농업을 관장했다. 맹자는 “우 임금과 후직은 태평성대에 세 번 자기 집 문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못했고, 제자 안회(顔回)는 난세에 가난하게 살면서도 안빈낙도(安貧樂道)의 태도를 잃지 않아 공자가 그들을 어질게 여겼다”고 했다.
맹자는 안회도 태평성대에 살았다면 우 임금이나 후직처럼 행동했을 것이며, 우 임금과 후직도 난세에 살았다면 안회처럼 행동했을 것이라며 ‘처지가 바뀌어도 모두 그러했을 것’이라는 뜻으로 ‘역지즉개연’을 썼다. 오늘날 쓰는 역지사지와는 다르다. 중국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우리나라 후세 사람들이 역지즉개연을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헤아려 보아야 한다’는 뜻을 첨가해 역지사지라는 성어로 변형해 쓴 것으로 추정된다.
역지사지는 자기중심이 아니라 상대의 시각에서 헤아려 보라는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긍정적인 심리적 특성이다.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편견과 선입견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상대의 감정과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역지사지는 공감력(共感力)을 먼저 갖춰야 한다. 맹자도 그 점을 강조한다. 더욱이 아버지 말씀대로 그가 가진 것을 얻어 갈등을 해소하려면 그가 내게 그것을 줘야 할 명분을 먼저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실행에 옮기기가 매우 어렵다. 공감을 넘어 역지사지해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손주들에게 서둘러 가르쳐야 할 삶의 지혜이자 결 고운 인성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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