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적자를 내고 있는 한국전력이 자금 조달을 위해 기업어음(CP) 발행을 늘리고 있는 것으로 14일 파악됐다. 올 들어 늘어난 CP 잔액만 벌써 1조8000억원에 달한다. 적자 늪에 빠진 한전이 자금 조달을 위해 회사채 발행뿐 아니라 단기 자금인 CP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지난해 한전채 발행 증가로 겪은 자금시장 혼란을 의식해 올해 ‘한전채 발행 자제’를 요구하는 상황에 한전이 CP로 연명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회사채 발행 부담, CP로 자금 조달
코스콤(옛 한국증권전산)에 따르면 지난 12일 기준 한전의 CP 발행잔액은 5조500억원이다. 작년 말(3조2500억원)보다 55% 늘었다. 한전의 CP 발행잔액은 2021년 말 1조500억원에서 가파르게 늘고 있다.
CP는 신용도가 낮은 회사가 선호하는 자금 조달 방식이다. 만기가 1~3개월로 짧지만 회사채보다 발행이 쉬워서다. 경쟁입찰로 금리가 결정되는 회사채와 달리 CP는 기업 신용등급에 따라 발행금리를 낮출 수 없는 것도 단점이다. 그래서 신용등급이 높은 공기업은 일시적인 자금공백을 메우기 위한 용도로 CP를 활용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최근 한전은 CP로 상당한 자금을 융통하고 있다. 이는 한전채 발행을 피하기 위한 측면이 큰 것으로 분석된다. CP는 사채 발행 한도에 포함되지 않아 이론상 무제한으로 발행할 수 있다. 과거 자본잠식에 빠져 사채 발행 한도가 꽉 찬 한국광물자원공사와 대한석탄공사도 CP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곤 했다.
지난해의 ‘한전채 구축효과’를 의식한 측면도 있다. 김명실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한전 적자가 기하급수로 커지고 있어 작년 말 늘려놓은 사채 발행 한도가 소진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증권사 자산관리담당 관계자는 “한전채 발행 여력이 좋지 않은 상황인 데다 한전채를 지나치게 발행하면 구축효과를 일으킨다는 목소리도 많으니 CP로 우회해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지난해 겪은 자금시장 혼란을 의식해 한전에 회사채 발행을 자제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다만 지금은 자금시장이 작년보다 안정된 상황이다. 작년 말 국내 신용평가사 3곳 평균 연 4.404%였던 한전의 CP 금리는 현재 연 3.67%로 낮아졌다. 한전의 3년 만기 회사채 금리(연 3.850%)보다 낮다. 하지만 CP는 단기적으로 자금을 돌려막는 데 쓰이기 때문에 자금 조달의 안정성이 떨어질 수 있다. 특히 미국 은행 위기 등 불안요인으로 자금시장이 다시 불안정해지면 CP 금리가 급등할 수 있다. 한전채 발행 한도도 빠르게 소진한전 적자가 쌓이는 가운데 그나마 안정적 자금조달원으로 볼 수 있는 한전채는 발행 한도가 빠르게 소진되고 있다. 작년 말 국회는 5년 일몰을 전제로 한전채 발행 한도를 ‘적립금+자본금의 2배’에서 ‘적립금+자본금의 5배’로 늘렸다. 바뀐 규정에 따른 한전채 발행 한도는 104조6000억원이다. 한전채 발행잔액은 12일 기준 77조1759억원으로 한도의 74%를 채운 상태다.
문제는 적자가 더 이어지면 자본금을 갉아먹기 때문에 이 발행 한도가 다시 축소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한전은 올 1분기에 시장 예상(약 5조3000억원 적자)보다 훨씬 많은 6조2000억원의 영업적자를 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2분기 전기요금이 인상돼도 올해 적자 우려는 여전하기 때문에 한전은 올해도 25조~30조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할 것으로 보인다”며 “비슷한 속도라면 내년 초에 한전채 발행잔액이 다시 한도에 다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올 들어 현재까지 발행된 한전채는 9조9500억원으로 지난해 연간 발행액(31조8000억원)의 3분의 1 수준이자 2021년 발행액(10조4300억원)에 육박한다.
결국 전기요금을 충분히 올리지 않으면 한전이 자금난을 타개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한 신용평가사 애널리스트는 “한전은 결손을 빨리 메워서 5년 뒤 발행 여력이 다시 ‘적립금과 자본금 합의 2배’가 돼도 문제가 없게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슬기 기자 surug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