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민 칼럼] 미국의 반도체 굴기가 더 두렵다

입력 2023-05-11 18:13
수정 2023-05-12 00:19
이름부터 ‘국뽕’ 가득한 화웨이(華爲·중화를 위한 희망)는 미국 제재 2년 만에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삼성, 애플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던 화웨이폰 점유율은 5위로 추락했다. 중국 기업 최초로 세계 반도체 매출 톱10에 들었던 화웨이 계열 팹리스 하이실리콘의 몰락은 중국에 더 뼈아픈 일이다. 이 회사의 점유율은 0%, 사실상 시장 퇴출이다.

세계 모바일 반도체 설계자산(IP)의 90%를 장악하고 있는 영국 ARM을 통한 원천기술 봉쇄, 대만 TSMC의 모바일 칩 수탁생산 중단에 화웨이는 손발이 다 묶였다. 더 암울한 것은 TSMC 같은 첨단 공장의 자체 건립이 요원하다는 점이다. 7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이하 공정에 필수인 네덜란드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반입 제한은 중국엔 치명적이다. ASML이 미국 제재 동참을 망설이다 끝내 합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광원 기술이 미국 샌디에이고의 레이저 기업 사이머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 및 자유 진영의 거미줄처럼 촘촘한 기술 네트워크는 현재로선 중국에 ‘넘사벽’이다.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누르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아킬레스건도 봤다. 미국엔 10나노 이하 반도체 선단 공장이 전무하다.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 두 달째인 2021년 3월, 두 개의 보고서가 미국 엘리트들을 흔들었다. 하나는 2020년을 기점으로 급기야 중국의 전체 전투함 수가 미국을 추월했다는 미 해군 보고서, 또 하나는 에릭 슈밋 전 구글 회장이 위원장으로 있던 ‘AI에 관한 국가안보위원회(NSCAI)’의 756쪽짜리 방대한 보고서다. 미 해군 보고서에는 중국의 대만 해협 봉쇄 위협과 관련한 내용이 담겼고, 슈미트 보고서의 요지는 ‘지나친 대만 의존도로 미국 기업과 군이 우월적 지위를 상실하기 직전’이라는 경고다. 일례로 스텔스 전투기에 쓰이는 반도체는 미국 AMD 계열의 자일링스에서 설계하지만, 생산은 대만 TSMC의 몫이다. 유사시 대만 TSMC가 중국에 넘어가면 미국은 제조업은 물론 군사·안보에 이르기까지 치명타를 입게 된다. 미국 내 반도체 생산기지 구축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추론이다.

중국이 반도체 전쟁에서 다운당한 지금은 미국의 시간이다. 엔비디아, 애플, 퀄컴 등 반도체 설계를 장악하고 있는 미국은 파운드리와 후공정까지 아울러 반도체 생태계의 완벽한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당장은 삼성과 TSMC를 불러들여 생태계 공백을 메우는 것이 급선무지만, 궁극적으론 미국 기업 육성을 통해 반도체 종주국의 영화를 재현하는 것이 미국 목표다.

미국 반도체 부활의 중심에는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인텔이 있다. 보조금·투자세액공제라는 중국식 지원책을 차용한 ‘반도체과학법’ 입법에는 인텔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기술 유출 우려가 있는 독소 조항 가득한 보조금 규정에도 인텔은 반색한다. 세계 반도체 생산의 80%는 동아시아, 13%는 미국, 7%는 유럽 기업이 맡고 있다. 인텔 CEO 팻 겔싱어는 10년 내 미국 기업 비중이 30%대로 올라갈 것으로 예상했다. 인텔은 오하이오에 3나노를 건너뛰고 2나노, 1.8나노 공장 두 개를 짓는 데 이어 미국 내 파운드리 추가 건설에 1000억달러 투자를 검토 중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기업은 사상 초유의 반도체 전쟁 격랑 한가운데 서 있다. 미국은 반도체 동맹국이지만 머지않아 치열한 반도체 경쟁국이 될 것임이 자명하다. 우리 기업의 선택지에는 묘책이 없다. 초격차 기술로 존재감을 유지하는 것뿐이다. 반도체 전쟁의 핵심 무기는 인력이다. 대학 등록금을 자율화하고, 교육 교부금 구조를 다시 짜는 등으로 대학에 우수 교수부터 유치해야 한다. 지방대 의대까지 채워진 뒤에야 서울대 공대라는 교육 분위기에서는 미래를 기대하기 힘들다. 반도체 등 첨단산업 인재들이 더 대접받을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형성돼야 한다.

미국은 반도체지원법상 보조금을 받은 기업이 일정 이상 수익을 올릴 경우 보조금 재원이 미국민의 세금이라는 억지 논리를 들어 초과 이익을 반도체 인력 양성에 투입할 구상이다. 반도체 굴기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중국은 최고 명문 칭화대에 반도체 대학원까지 설립해 최고 인재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반도체로 국가 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우리는 반도체 육성에 얼마만큼 총력전으로 임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