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간 과학기술 협력은 역사가 깊다. 6·25전쟁 전후엔 정치·안보 관계에 기반한 기술 원조 형태가 많았다. 한국의 원자력발전 기술도 이때 씨앗이 뿌려졌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요청으로 KAIST 전신인 한국과학원이 1971년 문을 열면서 새 국면을 맞았다. 1976년 양국 과학기술 협력의 제도적 기반인 ‘한·미 과학기술 협력 협정’을 체결하면서 공동 연구와 인력 교류를 시작했다.
국가 안보 차원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세계 각국의 기술 주도권 확보를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작년 5월 윤석열 대통령 취임 직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방한을 계기로 과학기술을 둘러싼 양국의 포괄적 협력이 강화됐다. 기존 한·미 간 안보동맹이 기술동맹을 포함한 포괄적 전략적 동맹 관계로 발전했다.
지난달 워싱턴 선언을 통해 우리는 양국 간 견고한 기술 공조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우주, 양자 기술, 바이오 분야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냈다. 우주 경제 분야 협력 차원에서 양국은 미 항공우주국(NASA) 고더드 우주비행센터에서 구체적인 우주 탐사 프로젝트를 공동 추진하겠다는 ‘한국 과학기술정보통신부-미국 NASA 우주 탐사 과학 협력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2021년 미국의 아르테미스 프로젝트에 한국이 약정 가입한 것보다 더 진전된 성과다. 그동안 개별 연구기관 차원에서 산발적으로 느슨하게 이뤄지던 협력이 광범위한 분야에서 전략적 협력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위성 부품 수출통제 등과 관련해 미국의 정책 변화도 이끌어냈다. 이달 말 3차 발사 예정인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 등 K우주산업 수출에도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한·미 협력을 바탕으로 과기정통부는 한국 우주항공청 설립에 속도를 낼 방침이다.
양국은 미래 산업과 안보의 ‘게임 체인저’로 주목받는 양자(quantum)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국가적 협력 합의서인 ‘한·미 양자과학기술 협력 공동성명문’에 서명했다. 한국은 또 미국이 주요 양자 기술 선도국 중심으로 운영해온 정부 간 양자기술 다자협의체에 13번째 회원국으로 참여했다. 양자 기술 후발국인 우리나라가 기술 추격을 가속화할 발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세계적 바이오 석학들과의 만남은 디지털 바이오 기술 혁신과 융합인재 양성 방향을 모색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코로나19 감염 예방용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 개발로 유명한 로버트 랭거 교수의 바이오 기술 상용화 노하우, 합성생물학의 선구자인 제임스 콜린스 교수의 인공지능(AI)을 이용한 차세대 항생제 개발 프로젝트가 인상적이었다. 앞으로 과기정통부가 디지털바이오 신규 사업을 기획하고 ‘의사과학자’ 같은 융합 인재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신설하는 데 소중한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여러 굵직한 성과를 낸 이번 한·미 정상회담의 후속 조치를 논의하기 위해 오는 19일 한·미 간 장관급 과학기술 협력 채널인 ‘제11차 한·미 과학기술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린다. 양국의 과학기술·외교 부처와 기업, 학계가 참여해 첨단기술 전 분야에 대한 협력 현황과 정책을 공유하는 자리다.
지난 70년간 한·미 동맹의 중심축이 안보와 경제였다면, 향후 70년은 여기에 더해 기술이 양국 동맹의 중심축이 될 것이다. 과기정통부는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 총괄부처로서 책임감을 갖고 한·미 기술동맹이 더 견고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