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개혁 의지는 높았지만 기득권의 저항을 돌파할 묘수를 찾지 못했다. 한국경제신문이 전문가 110명을 대상으로 윤석열 정부가 지난 1년간 추진해온 변화의 방향과 속도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다. 거대 야당과 노조, 기득권이 버티고 있는 의제일수록 추진 속도가 느린 것으로 평가됐다. 정부가 시행령을 고치거나 행정력을 동원해 실행할 수 있는 분야에서는 추진 속도를 체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금개혁 속도 가장 느리다”
전문가들은 변화 속도가 가장 느린 국정과제로 연금개혁을 꼽았다. 연금개혁의 속도는 100점 만점에 40.2점으로 평가됐다. 국민연금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개혁은 필연적으로 보험료율 인상과 수급액 감소를 불러온다. 오랜 기간 보험료를 내온 중장년층, 이미 수령이 시작된 고령층의 반발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보험료율 및 수급액 조정은 국민연금법을 개정해야 가능하다. 더불어민주당의 동의 없이는 개혁이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구조다.
애초 윤석열 정부는 국민연금 개혁을 정권 초에 마무리 짓는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속도를 내왔다. 계획대로면 여야 합의를 통해 지난달 국회 차원의 개혁안을 내놓고 올 10월에는 정부가 이를 확정 짓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논의 과정에서 구체적인 보험료율 조정 수치 등이 알려질 때마다 지지율은 요동쳤다. 민주당도 “노후생활을 보장해야 한다”며 연금의 지속 가능성 논의는 방기했다. 결국 연금개혁은 3대 개혁 과제 중 가장 후순위로 밀렸다.
구체적인 방향조차 설정하지 못한 교육개혁도 마찬가지다. 유치원부터 초·중·고교, 대학까지 각각의 법안을 통해 규율되고 있어 개혁을 위해서는 민주당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시·도 교육청도 협조해야 하지만 상당수 교육청은 진보 성향 교육감이 장악하고 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의 저항을 꺾기도 쉽지 않다. 교육개혁 속도에 전문가들은 41.9점을 줬다. 노동개혁은 법치주의 확립만 속도
전문가들은 연금 노동 교육 등 3대 개혁 중 노동개혁을 가장 긴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59.8%가 3대 개혁 중 노동개혁이 가장 시급하다고 답했다. 연금개혁은 25.9%, 교육개혁은 14.3%였다.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개혁의 방향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높았다. ‘노사법치주의 확립’의 방향성에 80.4점을 줬다. 모든 국정 과제 중에 가장 높은 점수였다. 노동시장 유연화(70.7점),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75.5점) 등도 상대적으로 점수가 높았다.
하지만 속도에 대한 평가는 박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47.7점), 노동시장 유연화(50.8점) 등의 속도는 느린 것으로 평가됐다. 두 정책 모두 정규직 중심의 한국노동조합총연맹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외면하거나 반대하는 사안이다.
행정력으로 어느 정도 실행이 가능한 ‘노사법치주의 확립’의 속도는 57.4점으로 무난한 점수를 받았다. 화물노조 파업, 건설노조 폭력 등에 대해 실정법에 입각해 원칙적인 대응을 한 것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기득권 반대 우회할 묘수 찾아야”문재인 정권이 추진한 탈원전 정책의 정상화와 부동산 규제 완화는 추진 속도가 빠른 국정과제로 평가받았다. 탈원전 정상화는 특별한 법 개정 없이 정부 전력 수급계획 수정 등을 통해 이뤄져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았다. 부동산 규제는 전매제한 완화를 비롯한 상당수 규제가 시행령 개정을 통해 가능하다.
전문가들은 “지난 1년간의 분야별 개혁 추진 속도를 거울삼아 앞으로의 개혁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한 때”라고 입을 모았다. 야당과 노조, 기득권 세력을 설득하거나 이들의 반대를 우회할 묘수를 찾아야 한다는 의미다.
노경목/도병욱 기자
■ 설문조사 어떻게 진행했나
이번 설문은 윤석열 대통령 취임 1주년을 맞아 지난 4일부터 8일까지 전문가 110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경제·정책 전문가 47명 △기업인 41명 △정치·외교 전문가 22명이 참여했다. 1년간 윤석열 정부가 추진한 변화의 방향과 속도에 대해 주요 국정 과제별로 0~10점으로 평가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