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 광명시의 '인생 출판소' 프로젝트

입력 2023-05-09 17:45
수정 2023-05-10 11:16

“서울의 아가씨야~ 내일의 희망 안고 웃어다오~.”

지난 8일 주현미 가수가 부른 ‘꽃마차’가 경기 광명시립 소하노인종합복지관 한 강의실에서 흘러나왔다. 1942년 발표된 ‘꽃마차’는 청춘의 설렘을 담은 곡. 광명에 사는 10명의 어르신은 이 노래를 들으며 자서전에 담을 사진을 함께 보는 시간을 보냈다. 전모 할머니(70)는 아버지, 여동생과 함께 찍은 흑백 사진을 들어 보이며 “나도 한때는 뾰족구두 신고 명동 바닥을 휩쓸고 다닌 사람”이라고 익살스럽게 소개했다. 한바탕 웃음꽃이 강의실을 채웠다.

복지관에서 마련한 이 프로그램의 이름은 ‘인생 출판소’다. 참가자들은 14주간 매주 한 번 모여 2시간씩 자서전을 쓴다. 수업 마지막 주 복지관은 어르신들과 가족들을 초대해 자서전 출판기념회를 마련한다. 그동안의 삶을 반추하고, 남은 삶과 삶 이후도 준비하는 ‘웰다잉’ 복지 프로그램이다.

이날엔 2회차, ‘소중한 나의 인생순간’ 수업이 이뤄졌다. 이들은 차곡차곡 갈무리해둔 옛 사진 중 자서전 앞쪽에 실릴 2장씩을 골랐다. 제목을 정하고 그 순간이 언제인지, 어디서 누구와 함께했는지, 이 장면을 왜 지금 기록해야 하는지 이유를 써내려갔다.

이 순간들이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였던 이유는 다채로웠다. 전 할머니는 돌아가신 어머니와 함께 유치원 앞에서 찍은 사진을 꺼내며 “유치원 기린반 선생님으로, 학부모들에게 ‘선생님반에 아이를 보내고 싶어요’라고 인정받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도 아이들을 너무 예뻐하시고 교실을 방문해 간식을 주곤 하셔서 인기가 더 좋았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조모 할아버지(80)는 광주공군비행장 부사관 근무 시절 광주 송정읍내에 연 태권도장 개관식 날(1968년 3월 2일)을 ‘인생의 순간’으로 꼽았다. 사진 속엔 백발의 노인 대신 절도 있는 모습으로 많은 관중 앞에서 품새 시범을 하는 건장한 20대 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이후 교관으로 파월됐고, 월남국(베트남 공화국)에 태권도를 보급한 공로로 참모총장 표창도 받았다”며 “전역 후 버스기사로 일하다 다쳐 거동이 불편한 신세가 되고 보니, 그때 그 건강했던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고 했다.

제주 유채꽃밭에서 찍은 사진을 꺼낸 한 할머니는 “등쌀이 유독 심했던 시어머니와 함께 간 여행이어서 사진 속 나는 웃고 있지만, 속으론 울고 있었다”며 “고달팠지만 건강했고 꿈 많던 젊은 날의 내 모습”이라고 표현했다. 바쁘던 회사 일을 잠시 내려놓고 짬을 내 떠났던 가족여행의 한순간이나 먼저 떠나보낸 강아지와의 추억을 꺼낸 이도 있었다. 사진을 함께 넘겨 보던 이들은 “인생의 황금기가 있었기에 지금의 자손들이 있다” “삶을 충실히 살아낸 우리가 참 대견하다”며 서로 다독였다.

광명시립 소하종합노인복지관은 2021년부터 이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삶을 간직하고, 나와 가족에게 남길 말을 글쓰기를 통해 정리해보자는 취지다. 참가자들은 납골당에 방문하고, 영정으로 쓰일 ‘인생사진’도 찍어둔다. 복지관은 연명치료 여부를 미리 결정해 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법도 안내하고 있다.

안지연 소하복지관 복지사는 “이 어르신들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삶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보겠다며 프로그램에 참여한 깨인 분들”이라며 “삶 이후의 일어날 일을 고민만 하는 게 아니라 함께 준비하면서 남은 삶도 더 충실히 살 수 있는 힘을 얻으셨으면 한다”고 했다.

광명시는 초고령 사회를 맞아 시민이 존엄성 있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중요한 지방자치단체의 의무로 보고 있다. 2021년 웰다잉 인식 개선 용역을 벌였고, 지난해 시의회에선 웰다잉 조례를 통과시켰다. 시는 지난해부터 세 곳의 복지관에 인생노트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웰다잉 지도사 양성사업도 하고 있다. 박승원 시장은 “어르신들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각양각색의 삶에 대한 회고를 통해 죽음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해소하고 삶의 가치를 높일 기회를 갖길 바란다”며 “웰다잉 문화가 확산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을 벌여나가겠다”고 말했다.

광명=김대훈 기자 daep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