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 눈을 뜨게 하려고 바다에 몸을 던지는 심청, 그리고 용왕을 위해 어떻게 생긴 줄도 모르는 토끼의 간을 구하겠다고 뭍으로 나선 별주부.
누구나 아는 이들 이야기의 주인공에겐 공통점이 있다. 무대가 바다란 점, 그리고 ‘남을 위해 기꺼이 나를 희생하는 캐릭터’란 점이다. 국립창극단이 3년간 이어온 ‘절창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는 ‘절창 Ⅲ’를 지난 6~7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에 올렸다. 심청가와 수궁가를 씨줄과 날줄처럼 솜씨 있게 엮어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을 90분 내내 웃기고 또 울렸다. 바다에서 만난 심청과 별주부극은 사나운 바람이 부는 바닷가의 어두컴컴한 밤, 심청이 물에 빠지는 대목에서 시작한다. 심청의 애처로운 노래는 국립창극단의 중견배우 이광복(40·사진 오른쪽)이 섬세한 목소리로 전했다.
이어 등장한 안이호(44). ‘범 내려온다’로 유명한 이날치의 보컬, 그사람이다. 안이호의 등장과 함께 무대는 깊은 바다 수궁으로 변신한다. 안이호는 몹쓸 병에 걸린 용왕의 우스꽝스러운 모습과 어려운 한의학 정보를 나열하며 진맥하는 도사의 역할을 능청스러운 독창으로 매끄럽게 끌고 나갔다.
하이라이트는 3막이었다. ‘별주부의 집-심청의 꿈’ 장면에서 만난 별주부와 심청은 서로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다. 그러더니 돌연 심청이 별주부에게 ‘세기의 딜’을 청한다.
“나도 이제 내 인생 한번 살아볼랍니다. 나를 뱃사람들한테 데려가 주면 내가 시장 가서 토끼 간 구해다 줄 테니, 같이 갑시다.”
별주부는 답한다. “콜!”
심청을 등에 업고 뭍으로 헤엄쳐 나가던 별주부는 그제야 주변을 샅샅이 둘러보며 깨닫는다. ‘그동안 내가 바다에 사는 줄 알았는데, 우물에 살았던 것이구나. 용궁을 벗어난 바다는 이렇게도 아름다운 곳이었구나.’ 별주부(안이호)와 심청(이광복)의 구성진 가락에 “잘한다”, “얼씨구”하는 추임새가 객석에서 터져 나왔다.
심청을 뭍에 데려다준 별주부는 토끼 간을 찾는 대신 자유를 찾아 바다로 떠난다. 연꽃에서 다시 피어난 심청은 황제와 신하들로부터 황후가 되어줄 것을 요구받지만,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그저 맹인 잔치를 열어달라고 말한다. 아버지를 보고 ‘왜 아직도 눈을 못 뜨셨느냐’고 울부짖던 심청. 정작 아버지가 눈을 뜨자 심청은 아버지를 끌어안는 대신 궁 밖으로 걸어 나간다. 마치 별주부가 자유를 찾아 바닷속으로 돌아간 것처럼. “요즘 같으면 심봉사는 아동방임죄”절창 Ⅲ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옛 스토리에 현대적인 옷을 입혔다는 점이다. “요즘 같았으면 심봉사는 아동방임죄, 뱃사람들은 자살방조죄”(수궁가 대목)라든가 “옛날 명의도 요즘 병원 처방전과 다를 게 없네. 뭔 소린지 모르겠어. 그냥 한마디로 하면 될 것을!”(약성가)이란 노래 가사가 대표적이다.
“시대의 공감을 얻기 위해 충과 효라는 프레임 안에서 심청과 별주부를 꺼내주고 싶은 갈증이 있었다”는 이치민 연출의 의도가 반영된 장면이다. 이걸 두 배우가 재치 있는 몸짓과 애드리브로 매끈하게 살렸다.
현대적인 옷을 입었지만 소리만큼은 판소리 원형을 그대로 살렸다. ‘절창’이란 타이틀에 걸맞게 오로지 두 배우의 목소리만으로 심청 어미와 심청 아비의 소리를 낼 땐 객석에서 눈물 훔치는 소리가 들렸다. 선율 악기의 사용을 배제하고 북과 장구, 징 등 타악기를 추가해 장단의 변화와 사운드 디자인을 활용했다. 모던한 무대 디자인과 절제된 조명은 한 편의 SF 장르를 연상시켰다.
2021년 시작한 국립극장의 ‘절창’ 시리즈는 성과와 과제를 동시에 남겼다. 뛰어난 연출과 가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해가 어려운 판소리 가사는 풀어야 할 숙제다. 무대 한쪽에 자막으로 처리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성과는 분명하다. ‘고전을 비틀어 현재에 다가간다’는 기획 의도에 호응하는 관객이 갈수록 늘고 있어서다. 관객들의 성원에 앞선 두 편의 절창이 올해 앙코르 무대에 오른 게 이를 방증한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