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선 소설들이 있다. 최근 국내 출간된 <조용한 미국인>도 그렇다. 영국 작가 그레이엄 그린이 1955년 펴낸 이 장편소설은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베트남을 배경으로 한다.
호찌민의 베트남 민주공화국과 프랑스가 싸웠던 이 전쟁에서 미국이 프랑스를 지원하며 점점 발을 깊숙이 집어넣을 때다. 소설은 그런 미국의 순진한 이상주의를 경계하고 비판한다.
2차 세계대전 승리 이후 ‘자유의 수호자’라고 자부하던 미국에선 강한 반발이 일었다. 진보주의자들까지도 반미소설이라 질타했다. 이후 베트남전이 벌어지고, 무수한 문제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선견지명을 지녔다’고 재평가받았다.
진지한 주제를 다루지만 따분하지 않다. 여기에 이 소설의 매력이 있다. 어떻게 보면 세 남녀의 삼각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우선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 파울러가 있다. 영국 더 타임스 기자인 그는 전쟁을 취재하러 베트남에 왔다. 50대인 그는 지독히 현실주의적이고 냉소적이다. 딱히 삶에 의욕이 없고, 전장에서 축복처럼 죽기를 바란다.
어느날 낯선 미국인이 하나 나타난다. 막 학생티를 벗은 혈기 왕성한 젊은이로, 이름은 파일이다. 비밀리에 활동하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인 그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수립하고 미국의 이상을 온 세상에 전파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현실이 아닌 책 속의 사상에 심취한 채 혼란한 베트남의 한복판을 천연덕스럽게 누빈다.
그리고 베트남 여성 후엉이 있다. 20세인 그는 유부남인 파울러의 애인이다. 파일은 후엉을 본 순간 사랑에 빠지고, 후엉에게 두 사람 중 한 명을 선택하라고 종용한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히면서도 스스로 ‘오락물’로 칭한 대중소설을 쓰는데 거리낌이 없었던 작가는 이 소설에서 예술성과 대중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데 성공한다. 베트남을 배경으로 한 남녀의 삼각관계로 읽어도 재미있지만, 각 인물에 국가를 대입해 보는 묘미가 있다.
파울러는 파일에게 말한다. “그 방면에서 당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깨달아 주기를 난 하느님께 빌겠어요. 아, 당신의 온갖 동기가 항상 그렇듯이 훌륭하다는 건 나도 알아요. 난 당신이 몇 가지나마 가끔 나쁜 목적에도 신경을 써서 인간성에 대한 이해의 폭을 좀 더 넓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건 말이죠. 파일, 당신 나라에도 똑같이 권하고 싶은 사항이랍니다.”
하지만 그 ‘조용한 미국인’은 깨닫지 못한다. 그에게는 평화보다 신념이 훨씬 중요하다. 그의 순진한 세계관은 일종의 근본주의여서, 세상에는 신념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믿는다. 파일의 그런 신념은 결국 비극적인 사건을 불러온다.
작가는 전업 작가로 나서기 전 기자로 일했다. 1951~1954년엔 더 타임스와 르 피가로의 전쟁 특파원으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취재했다. 그 경험이 책에 녹아있다.
전쟁 르포를 읽는 듯 생생한 묘사가 일품이다. 베트남전을 몸소 경험하고 <하얀 전쟁>이란 소설을 쓰기도 했던 안정효 작가의 번역은 그런 장점을 잘 살렸다. 이 책은 2019년 영국 BBC가 선정한 ‘우리 세상을 만들어 낸 100대 소설’ 중 하나로 꼽혔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