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었다. 여기저기서 찬가가 쏟아져 나왔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의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 <세계는 평평하다>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는 이 책들에서 맥도날드 매장이 있는 나라끼리는, 혹은 델의 공급망에 속한 나라끼리는 전쟁하지 않는다는 과감한 주장을 폈다.
돌이켜보면 순진한 주장이었다. 맥도날드 매장은 전쟁을 막지 못했다. 세계화 역시 정점을 찍고 후퇴 중이다. 그런데 여기 또 한 명의 낙관주의자가 있다. 최근 국내 출간된 <세계화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을 쓴 마크 레빈슨이다. 그는 자신을 경제학자, 역사가, 언론인으로 소개한다. 타임, 블룸버그, 이코노미스트 등의 언론사를 거쳐 JP모간체이스, 미국외교협회, 미국의회조사국 등에서 일했다. 2006년 펴낸 <더 박스>가 유명하다. 컨테이너의 등장이 세계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는 책이다.
<세계화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에서 그는 “세계화는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세계화는 제조업 및 외국인 투자와 관련해서는 후퇴하고 있지만, 서비스 및 아이디어의 이동과 관련해서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흐름을 그는 ‘제4차 세계화’라고 부른다. 즉 ‘서비스업의 세계화’다. 책의 원제가 <상자 밖에서(outside the box)>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품으로 채워진 상자(컨테이너)의 흐름보다 아이디어와 서비스의 흐름이 훨씬 더 중요해진 시대라는 뜻이다. 음악을 CD가 아니라 스트리밍으로 듣게 된 것이 그런 예다.
다만 이런 낙관적인 주장은 크게 힘을 못 쓴다. 저자 자신이 책의 마지막 장에 짧게만 언급하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책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세계화의 역사다. 영어판의 부제인 ‘어떻게 세계화는 물건을 옮기는 것에서 아이디어를 퍼뜨리는 것으로 변했나’보다 한국어판의 부제인 ‘2세기에 걸쳐 진화한 세계화의 과거, 현재, 미래’가 책 내용을 더 잘 요약한다.
세계화의 역사를 비정통적인 관점에서 재미있게 읽고 싶다면 이 책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책은 ‘운송 비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1300년께 지중해를 오고 간 베네치아 갤리선은 약 115t의 화물을 실었다. 컨테이너 8개 분량에 해당한다. 노잡이들과 그들이 먹을 식량이 상당한 공간을 차지했다. 운송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비싼 물건을 실어야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향신료, 비단 같은 것들이다. 한 번에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는 증기선, 실시간으로 먼 나라의 물가를 알 수 있는 전신이 등장한 후에야 국제 무역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1956년 등장한 컨테이너 역시 세계화에 한 획을 그었다. 그전까지 갖가지 형태의 상품을 배에 싣는 데 2주의 시간과 100명 이상의 부도 작업자가 필요했다. 배에서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공장에서 만들어진 물건이 유럽 고객에게 당도할 때까지 3개월 걸렸다. 운송 비용은 상품 가치의 10~20%에 달했다. 열차로 운반한 컨테이너를 그대로 배에 싣는 건 그야말로 ‘혁신’이었다.
책이 해운업만 다루는 건 아니지만, 해운업과 관련한 부분이 가장 흥미로운 게 사실이다. 특히 초대형 컨테이너선 경쟁이 눈길을 끈다. 2000년대 들어 해운사들은 배 크기를 키우기 시작했다. 규모의 경제, 에너지 효율성, 환경 개선에 이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초거대선은 컨테이너를 싣고 내리는 데 시간이 더 걸렸다. 운항 속도도 느렸다. 이전엔 출항이 지연되면 속도를 높였지만, 초대형 선박은 그러질 못했다. 항구에 한 번에 화물이 몰리면서 병목 현상도 생겼다. 게다가 당초 예상보다 물동량이 늘지 않았다. 선복량 공급 과잉에 세계 해운 및 조선업계는 몸살을 앓았다. 책은 한국의 한진해운 파산과 대우조선해양의 대규모 손실이 그 여파라고 설명한다.
책은 세계화의 역사를 잘 요약해 보여준다. 해운업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건 이 책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금융 등 다른 관점에서의 서술은 부실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해운업 관점에서 세계화를 들여다보고 싶다면 그의 전작인 <더 박스>가 있다는 점도 이 책을 모호하게 만든다. <더 박스>는 2016년 개정판이 나왔다. 600여 쪽으로 이 책보다 두 배가량 두껍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