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오는 7일부터 1박2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지난 3월 15~16일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한 지 약 두 달 만이다.
일본 정계에서는 기시다 총리의 방한을 ‘윤 대통령 지원 성격의 방문’으로 평가했다. 한·일 관계 정상화라는 결단을 내렸지만 국내 여론의 반발로 고전하는 윤 대통령을 측면 지원하기 위한 방문이라는 것이다. 기시다 총리도 3일 윤 대통령을 예방한 아키바 다케오 국가안전보장국장을 통해 “한·일 관계 개선을 주도한 대통령의 용기 있는 결단을 높이 평가하며, 이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마음으로 이번 답방을 결심하게 됐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과거사 언급 어디까지 할까
이날 일본 언론들은 한국 측이 7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총리에게 강제징용 문제 해법의 이행 상황을 설명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한국 정부는 3월 6일 ‘제3자 변제’ 방식의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 해결책을 발표했다.
피해자 15명 가운데 10명의 유족이 정부 해결책을 받아들였지만 5명은 일본의 사죄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부정적인 한국 내 여론을 감안하면 기시다 총리가 직접 ‘사죄’와 ‘반성’을 언급하는 것이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 정부가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을 내놓은 날 기시다 총리와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상은 “1998년 한·일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포함한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고만 발표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기대와 달리 이번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총리가 ‘깜짝 사죄’를 할 가능성은 작다고 내다봤다. 교도통신은 전날 “기시다 총리가 정상회담에서 역사 인식을 둘러싼 역대 일본 내각의 자세를 계승한다는 견해를 밝힐 방침”이라고 보도했다. 기존 입장을 반복하는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설명이다.
기시다 총리의 취약한 당내 기반도 파격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로 꼽힌다. 내년 9월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둔 그가 당내 최대 파벌이자 한국에 강경한 입장인 아베파를 의식할 수밖에 없어서다.
지난달 24일 한국이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우대국)에 재지정한다고 발표한 다음 날 일본 담당 장관인 니시무라 야스토시 경제산업상은 “한국의 자세를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 복귀시키겠다고 화답하는 대신 내놓은 어깃장이다.
니시무라 경제산업상은 차기 총리 후보군 가운데 한 명이다. 하기우다 고이치 자민당 정무조사회장과 함께 아베파를 이끄는 유력 정치인이다. 사흘 뒤 일본도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 재지정한다고 발표했지만 니시무라 경제산업상의 발언은 한국에 대해 여전히 곱지 않은 자민당 최대 파벌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경제 분야 ‘선물 꾸러미’ 기대할 만역사 문제와 달리 경제 등 다른 분야에서는 선물 꾸러미를 기대할 만하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일본이 반도체 핵심 소재의 수출 규제를 해제하고,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 재지정하면서 두 나라의 무역분쟁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미·중 패권 경쟁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공급망 재구축을 서둘러야 하는 일본이 한국과의 협력을 강화해야 하는 측면도 있다.
반도체 공급망 강화, 전기차 배터리 분야 협업, 일본 정부의 디지털전환(DX) 협력 등에서 한국 기업들에 손을 내밀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일본 경영계 관계자는 “일본 정부가 대규모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한국 대기업의 반도체 관련 공장을 유치하는 깜짝 발표를 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금융 분야의 협력 강화 방안을 제안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금융위기가 발생할 때 달러 등 기축통화를 서로 융통하는 통화스와프 협정을 부활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작년 말 기준 4161억달러(약 557조원)까지 불어나 통화스와프의 효과가 크지 않다는 분석이다.
경제와 문화 교류 분야에서 두 나라의 관계는 한·일 관계 악화 이전 및 코로나19 확산 이전 수준을 회복하고 있다. 한국의 불매운동 여파로 2020년 8조엔(약 79조원)을 밑돈 두 나라의 무역 규모는 2022년 약 12조엔까지 늘었다. 이런 흐름을 반영해 사회·문화 교류 등 관계 개선을 위한 후속 조치가 폭넓게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는 이달 19~21일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다시 만난다. 요미우리신문은 “2주 간격의 정상회담을 통해 두 나라 관계가 크게 개선됐다는 인상을 대내외에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