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현의 시각] 근로시간 개혁이 헤매는 이유

입력 2023-05-02 18:22
수정 2023-05-03 00:21
윤석열 정부 노동개혁 1호 과제인 근로시간 제도 개편이 좌초 위기에 놓였다. 정부 입법예고 8일 만에 정부 수장인 대통령이 보완을 지시했고, 주무 부처는 오는 7월 말까지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추가 의견을 수렴해 새로운 방안을 내놓겠다고 했다. 하지만 현 정부의 근로시간 개혁은 커다란 암초에 의해 배 바닥에 구멍이 크게 난 상태다.

고용노동부가 지난 3월 6일 내놓은 근로시간 개편 방안은 현재의 1주 단위 연장근로 관리단위 울타리를 넓혀 월, 분기, 반기, 1년 단위로 선택할 수 있게 하고, 선택 과정에 근로자들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도록 근로자대표제를 구체화하도록 했다. "노사자율 선택이 가능?" 불안내용만 놓고 보면 노동조합은 물론 근로자들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굳이 찾는다면 부분근로자대표제 도입이 노조의 세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정도다. 그럼에도 왜 개편안은 국회 문턱도 넘기 전에 힘이 빠진 걸까. 가장 큰 이유는 집권 초기부터 윤석열 정부 정책이라면 사사건건 반대해온 노동계의 ‘주 69시간’ 프레임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데는 정부의 사전 준비 또는 사후 대응에도 아쉬운 점이 적지 않다. 이른바 ‘3불(不)’이다.

먼저 ‘불안’이다. 고용부는 입법예고 당시 근로시간 개편을 위한 노사 합의 시 노조가 없는 사업장은 근로자대표와 합의해야 하는데, 현행법상 명칭만 있고 선출 절차나 권한·책무에 관한 규정이 없는 근로자대표제를 제도화하겠다고 했다. 또 부분근로자대표제를 도입해 근로 형태에 따른 불합리도 해결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근로자대표제 관련 입법은 2020년 노사정 합의 이후 방치돼 있고, 설령 입법이 된다고 하더라도 노조가 없는 영세사업장에서 사용자에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않을 수 있는 안전장치는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마치 입법만 되면 직장인 누구나 ‘제주 한 달 살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정부의 설명은, 특히 MZ세대(밀레니얼+Z세대)가 듣기에는 공허함 그 자체였다. 다시 규제의 칼 꺼낸 정부정부는 근로시간 개편을 추진하면서 기존 노사정 대화 방식이 아니라 전문가 그룹을 통한 ‘속도전’을 폈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지난 2월 국회에서 “사회적 대화 방식에는 정답이 없다”며 전문가 위주의 논의도 한 방편이라고 항변했다. 물론 하루가 급하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논의 자체를 거부한 노동계로 하여금 ‘주 69시간’이라는 몽니를 부리게 하는 계기가 됐다. 정부를 향해 철벽을 쌓은 것은 노동계였지만, ‘불통’의 이미지는 오롯이 정부 몫으로 남았다.

고질적인 한국 노사관계의 불신도 한몫했다. 한국 노사관계 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맨 밑바닥에 자리한 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세밀한 물밑전략 없는 정부의 과도한 자신감은 결국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근로시간 개혁이 좌초하면서 노동시장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1주 52시간’이라는 규제를 풀어 노사 자율로 근로시간을 정하게 하려던 정부가 여론을 되돌리기 위해 포괄임금제 집중 단속 등 다시 규제의 칼을 뽑은 것이다. 야당에선 이때다 싶어 포괄임금제 금지 입법까지 추진하고 나섰다. 개혁이라 칭하기도 민망했던 근로시간 개편마저 흔들리면서 진짜 노동개혁 시계는 점점 늦춰지고 있다.

백승현 경제부 차장·좋은일터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