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확 달라졌는데…여전히 IMF에 머무른 일본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입력 2023-04-26 10:45
수정 2023-04-26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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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低는 축복인가, 저주인가(2)에서 살펴봤듯 엔화 가치 하락은 일본 중소기업과 가계에 고통을 준다. 도요타자동차와 같은 수출 대기업이 누리는 '엔저 특수'도 과거에 비하면 크게 줄었다.

그런데도 "엔저는 일본 경제 전체에는 이익"이라는 구로다 일본은행 총재의 진단은 소수의 대기업이 얻는 이익의 합이 중소기업과 가계가 받는 손실보다 크다는 의미다.



그의 진단대로 달러당 엔화 가치가 130엔이면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1조엔 늘어난다. 경제성장률을 0.19% 끌어올리는 효과다. 엔화 가치가 150엔까지 떨어지면 일본 경제 전체적으로 1조5000억엔의 이익이 늘어나면서 GDP가 0.29% 증가한다.



엔저가 경제 전체에 이익이 되려면 대기업이 이익을 다른 경제주체들과 나눠야 한다. 일본 대기업은 그러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1989년에서 2021년까지 32년간 임금은 2% 올랐다. 반면 기업의 내부유보금은 4.5배, 배당금은 7배 늘었다. 2021년 일본 기업들의 내부유보금은 516조엔으로 10년 연속 사상 최대치를 이어갔다.



일본 상장사들의 배당 총액은 30조엔으로 근로자 금여 총액의 20% 수준까지 늘었다. 일본의 대기업들은 엔저로 올린 이익을 근로자와 나누기보다 주주를 우선시했다는 뜻이다. 일본인들이 지난해 엔화 가치하락을 '나쁜 엔저'로 부르는 이유다.



글로벌 인플레이션의 파고가 일본을 강타하고, 일본 정부와 노조가 이익을 나누라고 압박하자 올해 일본 기업들은 임금을 3% 이상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임금 인상률이 3%를 넘는 건 1994년 이후 29년 만이다. 하지만 '기업이 이익을 나누는데 적극적이다'라고 평가하긴 어렵다.

닛세이기초연구소는 올해 임금 인상률이 3%를 기록하더라도 물가를 감안한 실질 임금 상승률은 -0.2%를 나타낼 것으로 예상했다.

일본의 현재 상황을 보여주는 지표로 1998년과의 비교가 사용된다. 아시아 통화위기의 충격으로 일본장기신용은행, 일본채권신용은행 등이 일시적으로 국유화하는 등 금융 시스템이 위기를 맞은 때다.



소비가 얼어붙으면서 GDP가 1년새 6조엔 감소했다. 당시 엔화 가치는 135엔 안팎으로 오늘날과 비슷했다. 그로부터 25년여가 지난 오늘날(2021년말 기준) 빅맥 가격은 294엔서 390엔으로 1.3배, 최저임금은 649엔에서 930엔으로 1.4배 올랐다.

반면 GDP는 471조엔에서 536조엔으로 1.1배, 대졸 초임(남성)은 19만5500엔에서 21만2800엔으로 역시 1.1배 오르는데 그쳤다. 한국이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된 반면 일본은 여전히 IMF 시기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