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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갈 집을 구하거나 경영하고자 하는 회사의 주식을 매매하는 등 무엇인가 하고자 거래할 때, 대부분의 경우 다른 사람 또는 다른 회사와의 계약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계약을 체결했어도 상대방이 이행하기로 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파트 전세계약을 체결하고 들어가서 살기 위해 이사 준비를 다 마쳤는데 임대인이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전세를 못 주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경영권 이전을 포함한 주식양수도계약을 체결했는데, 사기로 했던 쪽에서 이대로 못 사겠다고 물러나는 상황도 생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느 한쪽에서 계약을 이행하지 않게 되면, 상대방 그러니까 전세로 들어가서 살려던 사람이나 주식을 팔려고 했던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 손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예방하고, 최대한 상대방의 의무 이행 가능성을 높이며, 상대방이 이행하지 않을 때는 신속하게 금전적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장치들을 계약서에 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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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장치가 ‘손해배상액의 예정’과 ‘위약벌’ 규정입니다. 상대방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을 때, 예를 들면 3억원의 전세계약을 체결해 놓고 갑자기 임대인이 전세를 못 주겠다고 할 때 임차인 측의 손해가 얼마인지 금액으로 계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만일 전세금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인 3000만원을 손해배상액의 예정으로 정해 놓으면 불이행한 임대인에게 명확하게 청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임대인 입장에서 어떤 사정이 생기더라도 3000만원의 배상을 하는 상황을 피하고자 전세를 주도록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위약벌은 손해배상액의 예정보다 더 강력한 제재로 상대방이 이행하지 않았을 때 손해배상과 별도로 불이행에 대한 일종의 징벌로 정한 금액입니다. 위의 전세계약에서 위약벌로 3000만원을 정해 놓았다면, 임차인 측에서는 위약벌 3000만원에 더해 자신이 입은 손해를 산정해 청구할 수 있습니다.
손해배상액의 예정과 위약벌의 또 다른 점은, 위약벌은 그 내용이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반하는 경우”에만 무효가 될 수 있지만, 손해배상액의 예정은 법원이 재량으로 적당히 감액할 수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즉 손해배상액의 예정액은 금액을 법원이 조정할 수 있는 여지가 위약벌보다 훨씬 넓습니다.
기업 인수를 위한 주식 매매 계약에도 이러한 손해배상액의 예정 내지는 위약벌과 관련한 조항을 포함해 상대방의 이행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아래에서는 주식매매계약 과정에서 약 3000억원의 이행보증금이 손해배상액의 예정인지 위약벌인지 문제가 됐던 사건을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이들 조항의 중요성을 짚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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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회사는, B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X회사 발행주식을 매수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래대상 주식의 가격은 약 6조원이었습니다. B은행은 X회사 주식을 높은 가격에 팔기 위해서 입찰방식으로 진행했고, 본 매매계약 체결 이전에 법적 구속력이 있는 양해각서(일종의 예비계약)도 체결했습니다.
양해각서의 내용에 따라 A회사는 주식 가격의 5%에 해당하는 약 3000억원의 이행보증금을 B은행에 지급했고, 양해각서에 규정된 주요내용이 포함된 본 매매계약을 체결할 의무도 부담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양해각서에는 매수인(A회사)의 책임있는 사유로 본 매매계약이 체결되지 않으면 이행보증금 3000억원과 그에 대한 이자는 위약벌로 B은행에 귀속된다고 규정돼 있었습니다.
A회사는 양해각서 체결 후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 등의 여파로 X회사 인수가 어렵게 되자, 본 매매계약의 체결을 거절하게 됩니다. 이에 B은행은 3000억원의 이행보증금을 위약벌로 B은행에 귀속됐다고 A 회사에 통지했습니다.
A회사는 ①본 매매계약 체결을 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책임있는 사유로 인한 것이 아니며 ②설령 자신의 책임있는 사유로 인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3000억원이 그대로 B 은행에 귀속되는 것은 과도하다고 주장했습니다.
A회사의 주장①에 대해 법원은 A회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A회사 책임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주장②에 대해서는 법원에서 심급별로 판단이 엇갈렸습니다. 1심과 2심에서는 양해각서에 기재된 그대로 ‘위약벌’이라고 보았고 무효로 볼 정도는 아니므로, 3000억원 전체가 B은행에 귀속된다고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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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법원은 판단은 달랐습니다. 재판부는 “비록 계약서에는 위약벌이라는 단어가 쓰여 있으나, 양해각서의 전반적인 조항의 내용들 특히 손해배상 관련 내용에서 3000억원 이외에 별도 손해배상을 고려하고 있지 않은 점, A회사 입장에서는 X회사의 재무정보를 제대로 확인할 기회가 없었던 사실을 포함한 계약 체결 전후의 사정 등을 종합해 ‘손해배상액의 예정’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따라 손해배상액의 예정 금액을 감액할 여지가 크다고 보았고, 결과적으로 A회사는 이행보증금의 40%에 해당하는 1200억원을 돌려받게 됐습니다.
이처럼 주식매매계약을 포함한 각종 계약에서, 상대방의 불이행 시 제재 조항은 매우 중요한 이슈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계약 체결을 준비할 때, 개별 거래의 성격이나 상황, 계약을 완결하여야 할 당사자의 필요성 등 사정에 따라 제재 조항을 ‘손해배상액의 예정’으로 할 것인지, ‘위약벌’ 조항으로 가져갈 것인지의 의사결정부터 시작해 금액을 어느 정도로 하고 실제 조항을 어떻게 쓸 것인지 등의 과정에 대해 섬세하고 깊이 있는 검토가 필요합니다.
나아가 체결된 계약에서 어느 한쪽이 의무를 불이행하고 불이행 시 제재 조항 관련 소송이 진행된다면, 계약서의 문구 및 전체적 조항의 관계, 계약 체결의 배경이 체결 전후 관련 사정들을 잘 정리해 해당 당사자에게 유리한 사항을 법원에 효과적으로 부각해야 할 것입니다.
전용원 법무법인 트리니티 변호사
넷마블 법무팀장(2018~2019년)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2008~2018년)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 Master of Laws (LL.M., 법학석사)
사법연수원 37기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