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4월 26일 07:37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요즘 '영끌족'(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한 사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부동산 가격은 떨어지고, 대출 금리는 급격히 올라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차액결제거래(CFD) 등으로 '빚투'(빚내서 투자)에 나섰다가 주가 급락 직격탄을 맞고 있는 '개미'들도 적지 않다. 최고의 투자 전문가들이 모인 사모펀드(PEF)도 '영끌족'이나 '빚투족'과 똑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사례가 적지 않다.
서민들이 주택을 구매할 때 대출을 일으키듯이 PEF도 기업을 인수할 때 '인수금융'이라는 불리는 대출을 일으킨다. 서민들이 주택을 담보로 부동산 대출을 일으킨다면 PEF는 인수기업의 주식을 담보로 인수금융을 일으킨다. 인수한 회사가 벌어들이는 수익 일부를 배당 등의 형태로 받은 뒤 인수금융 이자를 지급한다. 초기에 이자를 낼 돈도 함께 빌리는데 이를 한도대출(RCF)이라고 한다.
저금리 시기에 인수금융은 PEF 수익률을 높이는 최고의 무기가 된다. '몸값' 1000억원짜리 회사가 1년만에 2000억원이 된다고 했을 때 담보인정비율(LTV)을 얼마로 책정했느냐에 따라 PEF의 수익률은 달라진다. 투자금 전액을 자체 펀드자금으로 조달했을 경우 PEF의 연간 투자 수익률은 100%다. 절반을 인수금융으로 조달했다면 200%, 투자금의 90%를 인수금융으로 조달했다면 수익률이 1000%로 뛴다. 잘 됐을 때 얘기다.
저금리 시절 빌렸던 인수금융이 고금리 상황에서 '폭탄'이 될 수 있다. 만기 연장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리파이낸싱 하더라도 고금리 이자를 부담하느라 인수한 기업의 현금흐름이 꼬이게 되기도 한다. 고금리 여파로 기업 가치가 급락하면서 LTV 비율이 깨지면서 기한이익상실(EOD) 이슈가 발생하기도 한다.
홍콩계 PEF 운용사 앵커프라이빗에쿼티(PE)의 카카오뱅크 투자가 대표적인 사례다. 앵커PE는 2021년 11월 카카오뱅크 지분 2.23%를 담보로 한국투자증권으로부터 2600억원 가량의 인수금융을 제공받았다. 카카오뱅크 기업공개(IPO) 이후 주가가 폭등하면서 보유 지분의 가치가 8000억원 이상까지 불어났던 때였다. 당시 앵커PE가 조달한 인수금융의 LTV는 주가 대비 30% 정도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인수금융이 문제로 불거지기까지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고금리 여파로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카카오뱅크의 주가가 급락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말 카카오뱅크 주가가 1만5800원까지 떨어졌을 당시 EOD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앵커PE는 인수금융을 일으키면서 펀드투자자(LP)들에게 지급했던 수익금을 반환하는 방안까지 검토했다. 최근 1000억원 미만의 자금을 구해서 인수금융 일부를 상환하면서 급한 불은 껐다. 자금 출처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LTV 수준을 감안할 때 추가 대출 상환 등이 필요할 것으로 알려졌다. 앵커PE는 투자금을 상환하기 위해 인수금융을 일으켰지만, 오히려 LP와의 신뢰 관계에 금이 간 것으로 전해졌다.
IB업계에서는 무리한 '빚투'와 같이 과도한 인수금융은 '독'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인수 기업의 현금 창출 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인수금융으로 회사 경쟁력까지 훼손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인수금융으로 망가진 대표적인 사례는 케이블업체 딜라이브(옛 C&M)였다. 2007년 맥쿼리와 MBK파트너스에 인수된 딜라이브는 2015년까지 총 8년동안 이자로만 1조원 넘는 돈을 갚았다. 케이블사업 특성상 설비투자(CAPEX)가 많이 드는데, 이를 간과하고 인수금융을 일으켰다가 인터넷TV(IPTV)로의 전환기에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딜라이브의 경우 CAPEX를 감안하지 않고 무리하게 인수금융을 일으켰다가 기술개발(R&D) 비용이나 마케팅 비용을 확보하지 못했다"며 "과도한 대출로 매각 역시 적기에 이뤄지지 못하다보니 회사가 망겨졌다"고 말했다.
지난해 고금리 전환기에 잠잠했던 인수금융 시장이 또 다시 과열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시장에선 조 단위 규모의 SK쉴더스 인수금융도 주요 감시 대상으로 꼽고 있다.
PEF 관계자는 "물리보안 업체인 SK쉴더스의 경우 딜라이브처럼 CAPEX 투자가 많이 들어간다"며 "이를 감안하지 않고 현금창출 능력만보고 인수금융을 일으켰다가 회사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했다.
한 인수금융 담당자는 "PEF와 인수금융 주선사, 대주단으로 나서는 금융기관들은 과거 사례를 참고해서 회사별 적정 LTV를 책정한 뒤 인수금융 규모를 정해야 한다"고 했다.
이동훈 기자 lee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