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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체 수출에서 수입을 뺀 무역수지를 보더라도 엔저는 더 이상 반가운 요인이 아니다. 1995~1998년 달러 당 엔화가치는 80엔에서 140엔으로 떨어졌다. 이 때만 해도 엔화 가치가 1엔 떨어질 때마다 연간 무역흑자가 970억엔씩 늘었다. 당시 일본의 주력 수출품인 TV와 자동차 판매가 늘어난 덕분이었다.
하지만 2011~2015년에는 엔화 가치가 1엔 떨어지면 무역수지가 160억엔씩 적자가 났다. 기업들이 생산시설을 해외로 이전한데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원전 가동을 전면 중단하고 화력발전 비중을 급격히 높인 탓이었다. 일본은 에너지 자원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한다.
현재는 엔화 가치가 1엔 떨어지면 무역적자는 7000억엔씩 늘어난다. 일본 최대 기업 도요타자동차의 지난해 손익분석에 일본 제조 대기업의 현 주소가 잘 나타나 있다. 2022회계년도 도요타자동차는 2조4000억엔의 영업이익을 올릴 것으로 전망한다. 2021년의 2조9956억엔보다 20% 줄었다.
엔저에 따른 환차익으로 1조850억엔을 올리지만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1조6500억엔을 까먹는 탓이다. 일본 최대 수출 제조기업 도요타에도 엔저는 마냥 반가운 요인이 아닌 셈이다.
제조업체들의 엔저 효과가 예전만 못한데 비제조업체들의 손실까지 반영하면 엔화 가치 하락으로 인한 이익은 더욱 쪼그라든다. 엔화 가치가 본격적으로 하락하기 시작한 작년 2분기(4~6월) 닛케이225지수를 구성하는 제조업체 110곳은 1조470억엔의 환차익을 올렸다. 반면 비제조업종의 대표 기업인 소프트뱅크그룹 한 곳만 같은 기간 8199억엔의 환차손을 입었다.
제조업, 비제조업을 포함해 일본 기업 전체적으로 이 기간 엔저 효과는 4200억엔까지 줄었다. 이마저도 대기업에 해당하는 얘기다. 386만개에 달하는 일본 기업의 99.7%를 차지하고, 일본 근로자의 69%를 고용하는 중소기업에 엔저는 악몽에 가깝다.
중소기업의 매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3%에 불과하다.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입 물가 상승의 직격탄을 맞는 반면 수출 경쟁력 향상으로 누리는 이익은 쥐꼬리만하다는 뜻이다.
지난해 도쿄상공리서치가 5398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61.6%는 '엔저는 경영에 마이너스'라고 답했다. '플러스'라는 응답은 4.6%에 불과했다. 시장 조사회사 데이코쿠데이터뱅크가 작년 8월 실시한 조사에서도 '엔저로 실적이 악화됐다'는 중소기업이 80%를 넘었다. '이익이 늘었다'는 기업은 10%에 그쳤다.
가계 입장에서도 엔저는 부담이다. 미즈호리서치&테크롤로지에 따르면 달러 당 엔화 가치가 130엔일 때 연간 수입이 900만~1000만엔인 세대의 부담은 2021년보다 1만7000엔 늘어난다. 급등한 에너지 가격까지 반영하면 모든 세대의 부담이 연 평균 6만엔 정도 늘어나는 것으로 분석됐다. 대부분 냉난방비와 식료품 비용이어서 저소득층일 수록 타격이 더 커질 전망이다.
사카이 사이스케 미즈호리서치&테크롤로지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저소득층의 입장에서는 소비세가 3% 인상된 것과 같은 부담"이라고 설명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