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금융 수도로 불리던 영국 런던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의 여파로 쇠락한 뒤 프랑스 파리가 새로운 금융 허브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글로벌 투자은행(IB)은 앞다퉈 프랑스 지사를 확장하는 중이다. 프랑스 금융권에선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가 다시 찾아왔다는 평가가 나온다. ◇런던 떠나 파리로 몰려든 IB
18일(현지시간) 블룸버그에 따르면 글로벌 IB가 영국 런던에서 프랑스 파리로 본거지를 옮기고 있다. 세계 최대 IB인 JP모건은 파리에 550여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2019년에 비해 22배 늘었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프랑스 지사 규모를 2016년 대비 6배 확장했다. 파리의 경쟁상대인 프랑크푸르트에 본사를 둔 도이체방크도 지난해 신용 사업부를 파리에 배치했다.
IB가 본사를 옮긴 건 파리가 유럽의 금융 허브로 자리 잡기 시작해서다. 2016년 6월 이뤄진 브렉시트가 발단이 됐다. 영국이 EU를 탈퇴하며 더는 '패스포팅' 권리를 누릴 수 없게 됐다. EU 권역에 있는 한 국가에서 설립 인가를 받으면 다른 국가에 지점을 개설할 때 별도 인가받을 필요가 없는 제도다. 영국에 지사를 설립하면 비효율성이 늘어나는 셈이다.
영국에 머물 요인이 사라지자 인재와 자산이 유럽 대륙으로 이동했다. 컨설팅업체 EY에 따르면 2016~2021년 런던에서 7600여개의 전문직 일자리와 1조 3000억유로(약 1880조원) 규모의 자산이 유럽으로 넘어왔다. 7600여개 일자리 중 3000여개가 파리로 옮겨갔다. 런던이 가난해질수록 파리가 부유해졌다는 의미다.
프랑스는 브렉시트를 계기로 2019년 런던에 있던 EU 은행위원회를 파리에 유치했다. 유럽증권시장국(ESMA), 유럽은행감독청(EBA) 등에 이어 유럽 주요 금융 당국이 모두 파리에 본사를 둔 것이다. 프랑스는 금융기관 주재원들을 위해 국제학교를 파리에 2년간 3개 신설했다. 영어와 프랑스어 사용을 병행하는 파리의 사립학교 수도 크게 늘었다.
금융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지난해 11월 프랑스 증시가 19년 만에 처음으로 영국 증시를 앞섰다. 작년 9월 리즈 트러스 내각이 발표한 감세안의 여파다. 깜짝 발표에 영국 국채 가치는 그리스를 밑돌고 파운드화는 37년만의 최저치를 찍었다. 트러스의 사임으로 일단락됐지만 영국에 대한 불신은 여전하다. 반면 프랑스는 올해 중국 리오프닝 효과로 명품 기업 실적이 개선되며 영국과의 격차를 더 벌렸다.
◇제2의 벨 에포크
파리가 유럽의 금융 허브로 떠 오르자 프랑스 금융권에선 '벨 에포크'가 다시 도래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벨 에포크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프랑스의 문화예술 전성기를 뜻한다.
프랑스 고소득층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IB 트레이더와 펀드매니저가 파리로 이주해서다. 지난 1월 유럽은행감독청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프랑스에 거주하는 고소득(연봉 100만유로 이상) 금융업 종사자 수는 2017년 이후 80% 증가한 255명을 기록했다. 경쟁국인 독일(127명)을 크게 앞선다.
고소득층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파리의 고급주택 가격도 상승했다. 자가거주율(33%)이 낮은 파리 특성을 감안하면 집값이 오른 건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주로 파리 7구, 8구, 16구 등 IB 유럽 본사가 몰려있는 개선문 인근 지역이 급등했다. 세 지역에서 면적 200㎡(약 60평) 이상 고급 아파트 가격은 지난 5년간 33% 상승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파리가 다시 부흥하면서 이탈리아 밀라노 부동산 시장도 덩달아 활성화됐다. 고소득층이 밀라노 휴양지에 있는 고급 콘도 등을 매입하기 시작해서다. 아예 밀라노로 이주하는 고액 자산가도 나타났다. 이탈리아는 외국인 거주자가 국외에서 벌어들인 소득의 70%가량을 비과세해준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