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생 인류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호모 사피엔스'란 단어는 그다지 낯설지 않다. 이족직립보행을 하고 도구와 언어를 사용한 인류의 조상으로, 라틴어로 '슬기로운 자'란 뜻이다.
독일의 고고유전학자 요하네스 크라우제와 과학 칼럼니스트 토마스 트라페는 그들의 저서 <호모 히브리스>에서 현대 인류를 새롭게 정의 내린다. 제목과 같은 '호모 히브리스'다. 저자들은 20세기가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히브리스'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히브리스는 그리스어로 지나친 오만과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과신을 뜻한다.
이 책은 먼저 호모 사피엔스가 진화의 정점을 찍고 지구의 지배자가 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빙하기의 추위, 화산폭발, 끝없는 장마, 잔인한 맹수 등의 위험이 도사린 와중에 인류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류는 무력하고 왜소한 존재일 뿐이었지만, 자연에 순응하기보다는 이를 이용하고 극복해나갔다. 숨가쁜 속도로 퍼져나간 호모 사피엔스는 살상기술과 도구를 이용해 거대 동물을 사냥하고 육류를 섭취했다. 그들의 발이 닿는 곳마다 거대 동물들이 삽시간에 사라져갔다.
저자들은 20세기에 이르러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히브리스'로 만든 것은 전염병이라고 주장한다. 전염병은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지만, 반대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되기도 했다. 20세기 전반기 백신과 항생제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 인류는 '신의 형벌'로 받아들였던 전염병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의학이 점점 발달하면서 이제는 유전자 가위로 인간의 설계도를 고치고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자신감이 과해진 탓일까, 인류는 점차 자기파괴적인 방향을 향하고 있다. 팽창하고, 소비하며, 정복해 고갈시키려는 충동에 사로잡혀 있다는 설명이다. 최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전술핵 사용 카드를 위협용으로 내세우면서 지구 종말의 시계가 90초 앞당겨지기도 했다. 이 시계는 미국 핵과학자회에서 인류에게 핵전쟁의 위기를 알리기 위해 상징적으로 만든 시계다. 뿐만 아니다. 기후위기, 인구과잉, 생태계 붕괴 등 인류가 자초한 위기들이 눈 앞에 다가와 있다.
이 책은 인류가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될 것이라고 단정짓진 않는다. 저자들은 인류가 수많은 위기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후손인 만큼, 순응하지 않고 극복하는 존재이기에 지금의 위기에 대해서도 돌파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에겐 위기에 맞서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유전자가 새겨져 있단 희망의 메시지 역시 전달한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