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년간 남자는 수많은 밤을 후회로 지새워왔습니다.
그 일은 남자가 열세살 때 벌어졌습니다. 한 살 아래였던, 말을 잘 따르던 귀여운 동생. 뭘 하든 어디를 가든 형제는 늘 함께였습니다. “얼음이 녹고 있으니 위험하다”는 아버지의 말 따윈 귀에 들어오지 않던 나이. 형제는 함께 빙판 위에서 신나게 스케이트를 탔더랍니다. 그러다 소년의 발밑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고, 코와 입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차디찬 물, 나를 구하려고 뛰어드는 동생의 다급한 얼굴, 그리고 흐려지는 의식…. 집 침대에서 눈을 뜨니, 동생은 더는 세상에 없었습니다. 살아남은 건 남자뿐이었습니다.
어느덧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남자가 약해지면 튀어나와 마음을 헤집어 놓곤 했습니다. 부모님과 여러 형제의 죽음은 우울증을 더욱 심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모두 지난 일. 이제 남자에게는 아내가 있고, 아이도 생겼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이제 상처는 뒤로 하고 잘 살아 보자고.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독일 낭만주의 거장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0)의 삶과 그가 겪었던 아픔, 작품 이야기를 풀어 봅니다. 상처 딛고 ‘슈퍼스타’로
프리드리히는 1774년 독일 북동부의 도시 그라이프스발트(당시에는 스웨덴)에서 열 명의 자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집안 형편은 나쁘지 않았지만, 소년이었던 프리드리히는 7살 때 겪은 어머니의 죽음을 비롯해 많은 죽음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열세살 때의 사건은 결정적이었습니다. 빙판이 깨져 물에 빠진 프리드리히를 구하려던 동생이 물에 빠져 세상을 떠난 겁니다. 이 일은 두고두고 그에게 트라우마가 됐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이후 삶과 죽음, 계절의 순환 등 세상의 섭리와 종교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삶의 허망함에 일찌감치 눈을 떴기 때문이었을까요. 이듬해부터 프리드리히는 예술을 시작했습니다. 인근 대학교에서 ‘풍경화 고수’로 이름을 날리던 드로잉 교수에게 그림을 배우기도 하고, ‘단순히 눈에 보이는 풍경보다 마음으로 보는 풍경이 중요하다’는 가르침도 받았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유럽 미술계에서는 풍경화를 시시하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풍경을 있는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게 무슨 예술이냐는 거지요. 하지만 프리드리히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대자연이야말로 세상의 섭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평범한 사물에서도 우주의 원리와 신의 존재를 떠올리던 그에게는 풍경화야말로 진정한 예술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자신의 마음속 여러 풍경을 섞어 재구성한 겁니다. 대자연이 품고 있는 위대함과 무한성을 최대한 강조하기 위한 장치였지요. 안개와 어둠, 빛에 대한 특유의 섬세한 묘사는 이런 효과를 극대화했습니다.
남다른 관찰력과 통찰력 덕분에 프리드리히는 풍경 화가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실연으로 인한 슬픔과 어릴 적 트라우마 등이 겹치면서 2년간 우울증을 겪는 등 여러 고생도 했지만, 스물한 살이 되던 1805년 처음으로 중요한 예술적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주최한 그림 대회에서 세피아 먹물로 그린 드로잉 2점으로 최고상을 받은 겁니다.
이후 그는 탄탄대로를 걸었습니다. ‘산속의 십자가’와 ‘바닷가의 수도사’ 등 작품이 미술계의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그림이 잘 팔린 덕분에 돈도 꽤 많이 벌었습니다. 누나와 아버지의 죽음을 연달아 겪으면서도 프리드리히는 거침없이 나아갔습니다.
1816년에는 드레스덴 예술원 회원에 선출돼 월급을 받게 됐고, 생활이 안정되면서 2년 후인 44세 때에는 결혼까지 하게 됐습니다. 아내는 19살 연하의 쾌활한 여성이었습니다. 기사 맨 처음에 나왔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를 비롯해 ‘뤼겐의 백악 절벽’ 등 그의 적지 않은 대표작이 이때 탄생했습니다. 이 시기 그림들은 프리드리히의 다른 작품들보다 상대적으로 분위기가 편안하고 여성 등장인물이 많은 게 특징입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습니다.
거듭된 불운, 살아난 트라우마
하지만 프리드리히에게 허락된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1820년 가장 친한 친구이자 예술적 동지였던 게르하르트 폰 퀴겔겐이 산책하러 나갔다가 강도에게 살해당하면서, 그의 마음속 트라우마가 되살아난 겁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유럽의 정치적 상황이 급변하면서 유행이 급격히 변했습니다.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예술이 인기를 끌면서 프리드리히가 그리던 낭만주의 그림은 금세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영향으로 프리드리히는 예술 학교의 학과장 승진에서도 실패하게 됐습니다. 이때부터 프리드리히는 자기 내면으로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멀쩡한 아내와 친구가 불륜을 저질렀다고 의심하는 등 망상증과 비슷한 증세를 보이기도 했고요.
그 와중에도 프리드리히는 자신만의 예술을 추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전보다 좀 더 다채로운 색을 쓰는 등 여러 변화도 시도했습니다. 그의 후기 대표작 ‘빙해’나 ‘삶의 단계’는 이때 나온 작품입니다.
이런 노력도 무색하게 1835년 뇌졸중이 프리드리히를 찾아왔습니다. 팔과 다리가 불편해지면서 이제는 더 이상 유화를 그릴 수 없었습니다. 가난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5년 후 두 번째 뇌졸중 발작이 찾아오면서 행복했다고 하기엔 어려운 그의 66년 삶도 막을 내렸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가장 걱정했던 건, 가족들에게 유산을 한 푼도 못 남길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잊혔던 프리드리히의 그림은 20세기 초부터 본격적인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나치에 의해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화가’로 선전되는 수모를 겪으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년간 제대로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건 20세기 말이 돼서였습니다. 유한한 삶을 무한한 아름다움으로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해석하는 데는 다양한 시각이 있습니다. 종교와 신앙에 관련한 해석, 미학적 개념인 ‘숭고’를 중심으로 한 해석, 낭만주의라는 예술 사조를 중심으로 한 해석, 심지어 프리메이슨과 연관된 그림이라는 의견까지 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딱 떨어지는 정답은 결코 찾을 수 없을 겁니다. 프리드리히가 이렇게 말했으니까요. “예술의 유일한 근원은 바깥 세계가 아니라 예술가 마음속 깊은 곳의 설명하기 어려운 충동입니다.” 그러니 답은 감상하는 사람들이 각자 깊이 생각하고 느껴서 나름대로 찾는 수밖에 없겠지요.
제 나름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프리드리히는 평생 자신을 덮치는 여러 불행과 싸웠습니다. 거듭되는 불운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꺾여버렸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다시 일어나려고 노력했습니다. 프리드리히가 남긴 아름다운 작품들은 그가 이렇게 세상과 싸우며 몸부림쳤던 흔적입니다.
그래서 다시 그의 이 작품을 생각합니다. 죽음이 패배라면 우리는 모두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 먼지만 한 별에서 찰나를 살다 가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한 걸음씩 발자국을 남기며 나아가는 게 인생 아닐까요. 너무나도 무심하고,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잔인하지만, 때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그림 속에서 안개 바다를 바라보는 남자처럼요.
“세속적인 것에 고결한 의미를, 일상에 신비를, 알고 있는 것에 진기한 특징을, 유한에는 무한을 부여하는 것”(독일의 시인 노발리스)이라는 낭만주의에 대한 정의는 우리의 삶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곧 지나갈 봄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낭만적인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i>*이번 기사는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노르베르트 볼프 지음, 이영주 옮김), The Romantic Vision of Caspar David Friedrich (로버트 로젠블럼 등 지음), Caspar David Friedrich and the Subject of Landscape, Second Edition(조셉 코에르너 지음) 등 서적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svg version="1.1" xmlns="http://www.w3.org/2000/svg" xmlns:xlink="http://www.w3.org/1999/xlink" x="0" y="0" viewBox="0 0 27.4 20" class="svg-quote" xml:space="preserve" style="fill:#666; display:block; width:28px; height:20px; margin-bottom:10px"><path class="st0" d="M0,12.9C0,0.2,12.4,0,12.4,0C6.7,3.2,7.8,6.2,7.5,8.5c2.8,0.4,5,2.9,5,5.9c0,3.6-2.9,5.7-5.9,5.7 C3.2,20,0,17.4,0,12.9z M14.8,12.9C14.8,0.2,27.2,0,27.2,0c-5.7,3.2-4.6,6.2-4.8,8.5c2.8,0.4,5,2.9,5,5.9c0,3.6-2.9,5.7-5.9,5.7 C18,20,14.8,17.4,14.8,12.9z"></path></svg><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