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국가에선 여론이 권력 향배를 결정한다. 오죽하면 대통령이라는 최고권력자를 뽑을 때도 십중팔구 단일화 여론조사가 등장한다. 권력이 여론을 선택적으로 인용하며 다수의 폭정으로 치닫는 사례도 넘친다. 소설가 김훈은 이런 세태를 ‘여론조사가 최고의 권력이 되는 무지몽매한 시대’라고 개탄한다. 그래도 우리는 여론조사의 홍수를 피할 길이 없다.
여론 조작은 민주주의에 대한 테러에 다름없지만 함량 미달의 여론조사는 갈수록 극성이다. 부나방처럼 권력을 좇는 이들에게는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판이 취약하다. 선관위 미등록 업체를 통한 왜곡된 여론조사와 전파가 가장 일반적인 수법이다. 야권 인사가 대표인 한 업체가 ‘윤석열 대통령 탄핵지지 여론이 53%에 달한다’며 여론몰이한 게 불과 반년 전 일이다.
그런데 지명도와 인지도 면에서 국내 최고 수준인 한국 갤럽마저 여론 왜곡 구설에 올랐다. 편파적 질문을 통해 양곡법 개정 찬성이 60%에 달하고 반대는 28%에 그쳤다는 결과를 내놓은 것이다. 갤럽은 ‘쌀값 안정·농가소득 보장을 위해 찬성’ ‘정부 재정 부담 늘어 반대’라는 설문을 제시했다. 공급 과잉으로 쌀값이 되레 불안정해진다는 다수 전문가의 견해와 상반되는 문구로 ‘프레이밍 효과’를 노렸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이름값 높은 갤럽의 행태는 가뜩이나 낮은 여론조사 전반의 신뢰를 곤두박질치게 한다는 점에서 실망스럽다.
소위 진보진영이 여론 왜곡 의혹의 중심에 서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걱정을 더한다. 해산된 통진당 이석기 전 의원은 다수의 여론조사기관을 운영하며 숱한 조작 의혹을 받았다. 작년 10월 방송을 하차한 김어준도 ‘여론조사 꽃’을 설립해 경계경보를 울렸다. 좌파 특유의 목적주의적 사고가 객관성이 생명인 여론조사 시장을 어지럽힐까 걱정이다.
여론 조작은 해외에서도 많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정교한 여론조사 조작으로 세계 최연소 총리에 오른 스캔들로 1년 전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러시아가 소셜미디어 여론 조작으로 영국 브렉시트를 유도했다는 시각도 정설로 대접받는다. 여론조사기관 대부분은 영세 민간회사일 뿐이고 조작된 여론은 민주주의의 최대 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