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사람에게 '21세기 왕실'은 무슨 의미일까 [별 볼일 있는 OTT]

입력 2023-04-11 18:03
수정 2023-04-30 22:25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왕위 계승 순위'라는 꼬리표가 붙여진다.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정해진 예절 교육을 받고, 왕을 보면 언제나 무릎과 머리를 굽혀 인사해야 한다. 식사를 할 땐 왕이 식사를 마치면 음식을 더 먹을 수 없다. 결혼을 할 때도 왕의 허락을 받아야만 할 수 있다.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옛 절대왕정 시절의 얘기가 아니다. 21세기 영국의 왕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영국 왕실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 된 왕가다. 물론 왕이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지만, 왕은 여전히 영국 시민들에게 '영국의 얼굴'이나 다름없다.

새로운 왕실 일원이 생기면 영국 시민들도 버킹엄궁 앞에 몰려와 함께 축하하고, 반대로 왕실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시민들도 눈물을 흘리며 함께 슬퍼하는 이유다. 군주제에서 벗어난 지 100년도 더 지난 한국으로선 이해하기 힘든 장면들이다.

자연스레 이런 궁금증이 떠오른다. 영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왕실을 아끼고 따르는 걸까. 왜 왕실의 일을 자기 일과 동일시하고,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걸까.

작년 12월 나온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해리와 메건'은 이런 궁금증을 일부분 풀어준다. 한국에는 영상등급 심의를 거치느라 올해 1월 초 공개됐다.

이 다큐는 나오자마자 연일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영국 왕실을 뛰쳐나온 해리 왕자와 그의 아내인 메건 마클이 '왕실의 민낯'을 폭로하는 게 주 내용이라서다. 보수적인 왕실의 삶, 뿌리 깊은 인종차별 등 왕실의 내밀한 속사정을 거침없이 고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이 다큐는 역설적으로 영국에서 왕실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인지를 엿볼 수 있다. 고발과 폭로가 힘을 얻으려면 왕실이 영국에서 어떤 존재인지 설명해야 하니까 말이다. 다큐는 6부작에 걸쳐 해리와 메건, 역사학자 등의 입을 빌려 영국 왕실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한다.

다큐에서 그려지는 영국 왕실의 모습은 굉장히 복합적이다. 왕은 영국 사람들에게 '영국의 상징', 그 자체다. 영국 본토뿐 아니라 캐나다 호주 등 14개 영연방 국가들을 대표하는 왕은 살아있는 '통합의 상징'이자, '존경의 대상'이다.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영국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왕실을 통해 떠올리고,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동시에 왕실은 '가십거리의 중심'에 있기도 하다. 영국 언론들은 왕족의 사생활과 일거수일투족을 선정적으로 보도하고, 대중은 이를 가십으로 소비한다.

왕실과 영국 타블로이드 언론과의 관계 때문이다. 영국 왕실에는 특정 언론사들에게 왕실에 관한 기사를 먼저 보도할 권리를 주는 '로열 로타' 시스템이 있다. 해리 왕자는 다큐에서 "로열 로타에 속한 언론사는 '텔레그래프'를 제외하고는 전부 타블로이드"라고 주장한다.

이들 언론은 '혈세로 운영되는 왕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는 건 시민들의 알 권리'라며 스토킹도 불사한다. 타블로이드 언론이 쏟아내는 기사와 사진을 보다 보면 왕실 사람들은 존경의 대상이라기보다 '연예인'에 가깝게 느껴진다.

해리와 메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왕실의 이중적인 면모를 용감하게 폭로했다는 평가가 있는가하면, 결국엔 왕실을 이용한 콘텐츠로 돈벌이를 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둘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 이 다큐는 21세기 영국에서 왕실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한 사람들에게 힌트를 줄 수 있는 중요한 기록물이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