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 직원에게 여러 차례 고백했다가 거절당하자 자살을 암시하는 등 '가스라이팅' 한 것은 해고 사유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법원은 직장 내에서 이성 관계를 업무와 연관 지을 수 있다고 암시한 것도 직장 내 괴롭힘으로 보기에 충분한 증거라고 꼬집었다.
수원지방법원 제15민사부는 근로자 A씨가 자신을 해고한 회사를 상대로 청구한 해고무효확인 소송에서 이같이 판단하고 회사 측의 손을 들어줬다(2022가합10067).
특별히 성적인 접촉이나 직접적인 부하 직원에 대한 인사상 불이익이 없는 고백도 직장 내 괴롭힘이 될 수 있다는 판결로, '남녀 사이의 사적 관계'라는 안이한 인식에 경고를 전달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A는 2020년 7월 한 회사에 본부장으로 입사해 근무하던 기혼 남성 근로자다. A는 입사한 지 반년이 좀 지난 이듬해 2월, 소속 팀 미혼 여성 B에 “이성으로 좋아한다”고 고백했다가 거절당했다.
그럼에도 A의 집착은 계속됐다. 주로 회사 메신저를 통해 지속해서 구애했지만, B는 “죄송하다”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A의 고백은 멈추지 않았다. "보고 싶다""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고 메시지를 보내거나 일방적으로 꽃바구니를 배달시키는 일도 있었다.
B는 “좋은 상사로 생각하고 존경하지만 죄송하다”고 답하는 등 수차례 거절 의사표시를 전했다.
하지만 A의 일방적인 구애 행위는 끊이지 않고 계속됐고, 급기야 10월에는 B에 “회사의 다른 이사와 사귀냐, 대표이사와 만나고 있느냐”고 물으면서 이성 관계를 확인하려 들기도 했다. B가 "왜 궁금하냐"며 선을 긋자 A는 자살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참다못한 B는 A의 자살암시 사실을 회사에 알리면서, A에 대한 징계와 인사조치를 희망한다는 고충 신고서를 제출했다.
결국 회사는 A에 대해 직장 내 괴롭힘과 성희롱을 근거로 징계 처분에 들어갔고 결국 그해 12월 해고 처분을 내렸다. 이에 A가 회사를 상대로 "해고가 무효"라며 소송을 제기한 것.
A는 이 과정에서 A가 “없어져 주겠다”며 퇴사하겠다는 뉘앙스로 메시지를 보내자 B가 만류했고, B가 식사를 먼저 제안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어 "B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를 직장 내 괴롭힘이며 충분한 해고사유가 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직책상 A가 B의 상급자로서 인사평가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구애 행위의 상당수는 사내 업무용 메신저 프로그램을 이용해 이뤄졌다"며 "명시적으로 교제 거절 의사와 그 호감 표시에 대한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A는 지속해서 집요한 태도로 구애 행위를 계속했고 이를 업무와 연관 지을 수 있다는 모습을 보였다"고 꼬집었다.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라는 지적이다.
B가 퇴사를 만류했거나 밥을 먹자고 했다는 A의 주장에 대해서도 “이성으로서 거부해도 상사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직장 내 상급자로부터 고백받은 하급자가 보일 수 있는 전형적이고 통상적 반응”이라며 A의 주장을 일축했다.
이를 바탕으로 법원은 "A와 회사 사이의 신뢰 관계는 고용관계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현저히 훼손됐다"며 "A의 행위로 B가 받았을 정신적 고통과 이 사건 변론 과정에서 드러난 A의 태도 등에 비춰 보면, A가 계속 근무하는 것은 피해자 B의 고용환경을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하고, 해고가 징계의 재량을 남용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한편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응답자 11.0%가 직장에서 원치 않는 상대방에게 지속적 구애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고 지난 12일 발표한 바 있다. 신고 내용은 △가스라이팅 △강압적 구애 △신체 접촉 △악의적 추문 △외모 통제 등이었다.
또 원치 않은 구애는 남성(8.1%)보다 여성(14.9%)이, 정규직(9.2%)보다 비정규직(13.8%)이 더 많이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