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가 자기 사건을 깜빡 잊는 경우는 없습니다. 간혹 기존 변호사가 퇴사하며 담당 사건을 물려받는 경우 발생할 수 있지만 3회 불출석으로 소 자체를 취하하게 하는 이런 건 난생처음 봅니다."
대한변호사협회(변협)가 학교폭력 피해자 유족의 소송대리인으로서 재판에 불출석해 항소가 취하되게 만든 권경애 변호사(58·사법연수원 33기)에 대해 직권으로 징계 절차에 착수했다.
2015년 학교폭력 피해 끝에 사망한 고 박주원(사망 당시 16살) 양 어머니 이기철 씨는 가해자와 서울시교육청 등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씨 측 변호인인 권 변호사가 재판에 3회 무단으로 불출석하면서 소가 취하돼 패소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지난해 11월 패소가 결정됐음에도 약 5개월간 이 사실을 숨겨왔다는 점이다. 좀처럼 진척이 없는 소송 진행 상황을 확인하러 이씨가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오자 그제야 권 변호사는 자신이 재판에 참석하지 않아 항소가 취하됐다는 사실을 전했다.
권 변호사는 재직 중이던 법무법인에서 퇴사하고 일체 외부의 전화를 받지 않으며 잠적한 상태다. 이씨 측 변호를 새롭게 맡은 양승철 변호사에 따르면 "3년간 9000만원을 갚겠다"고 일방적으로 각서를 쓰고 자취를 감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일에 대해 일선 변호사들도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변호사 A 씨는 "개인 법률사무소의 경우 자기 사건을 깜빡 잊는 경우는 없다"면서 "법무법인이라 해도 담당 사건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리고 별산제 법인이 대부분이라 그 경우에도 본인 사건을 잊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A 변호사는 "다만 기존 변호사가 퇴사하면서 담당 사건을 물려받는 경우에는 간혹 사건을 잊을 수도 있다"면서 "하지만 전자소송에 보면 사건 재판일이 나오는 화면이 있고 자체적으로 일정 관리 프로그램을 쓰기도 하기 때문에 3회 불출석으로 소 자체를 취하하게 하는 변호사는 생전 처음 본다"고 전했다.
모든 변호사는 민사 행정 사건을 할 때 대법원 전자소송사이트를 사용하며 이곳에서 재판 일정을 확인할 수 있다.
B 변호사 또한 "재판 불출석하는 경우를 처음 봤다. 대부분 복대리를 해서라도 재판에 참석한다"면서 "재판의 존재 자체를 아예 잊고 있었거나, 신변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니라면 이런 경우는 보기 힘든 케이스다"라고 말했다.
복대리(複代理)란 법률 대리인이 자기가 대리할 권리의 전부나 일부를 다시 다른 사람에게 대리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C 변호사는 "재판 시간이 중복되거나 몸이 아프거나 기일을 착오하는 등의 사유로 재판에 불출석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면서 "하지만 같은 사건에 2번 이상 불출석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으며 완전한 과실이라고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해당 사태에 대해 "변호사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도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본다"고 부연했다.
C 변호사는 "변호사 수가 늘면서 수임 경쟁도 치열해졌다. 네이버 등 광고 홍보비만 수천에서 수억 원 쓰면서 정작 사건에는 소홀한 경우도 있다"면서 "전관예우 운운하며 브로커들이 사건을 싹쓸이하고 고액의 수임료만 챙기고 나 몰라라 하는 경우도 있다. 광고나 선임 절차를 깨끗하고 투명하게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변협은 "이번 일을 엄중한 사안으로 인식한다. 유족에 깊은 위로를 표한다"라며 "협회장 직권으로 조사위원회 회부를 준비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변협 조사위는 징계위원회 회부 직전 단계다. 변협 회규에 따라 협회장은 징계 혐의가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회원을 조사위원회에 회부할 수 있다. 징계위원회는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징계 여부를 결정한다.
권 변호사는 이른바 '조국 흑서'의 공동 저자로 명성을 얻었다. 이번 논란이 알려지며 재판에는 불출석하면서 정치권 주요 이슈에 대해서는 발 빠르게 의견을 개진하고 심지어 이씨 재판 이틀 전 150쪽에 달하는 도이치모터스 공소장을 분석했다고 SNS에 올린 일도 재조명됐다.
이 사건 심리를 맡은 서울고법 민사8-2부(당시 부장판사 김봉원·강성훈·권순민)는 지난해 11월 24일 이씨가 서울시교육청과 학교법인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항소심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이후 이 사건은 항소 취하로 원고 패소 판결이 난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는데, 이씨 측인 권 변호사가 재판에 3회 무단으로 불출석했기 때문으로 파악됐다.
민사소송법상 대리인 등 소송 당사자가 변론기일에 출석하지 않거나 출석해도 변론하지 않을 경우 소를 취하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 사건에서는 2회 기일 동안 원·피고 쌍방이 불출석한 후 원고 측 대리인이 기일지정 신청을 했으나 새로 정한 기일에도 다시 쌍방이 불출석해 항소가 취하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심은 이들 중 1명에게 책임이 있다며 일부 승소 판결을 했지만 이씨는 이에 불복해 항소를 제기했다. 하지만 권 변호사의 불출석으로 1심에서 유족이 승소한 부분도 패소로 뒤집혔다.
서울시교육청은 이씨를 상대로 소송비용액 1300만원의 확정 신청을 제기했으나, 뒤늦게 유족의 사정을 접한 뒤 소송비 청구 포기를 검토하기로 했다.
이미나 한경닷컴 기자 help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