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테슬라봇은 실제 움직이는 건가, 모형인가?”
지난 4일 국내 최대 규모 자동차 전시회인 ‘2023 서울모빌리티쇼’가 열린 경기 고양시 킨텍스 제1전시장. 면바지에 니트 차림의 한 남성이 등장하자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예고 없이 깜짝 방문한 겁니다. 정 회장이 서울모빌리티쇼를 방문한 건 2019년 이후 4년 만입니다.
현대차와 기아는 이번 서울모빌리티쇼를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EV9 등의 신차 및 다양한 콘셉트의 차량과 로봇을 공개하며 볼거리를 제공했습니다. 반면 GM, 아우디, 폭스바겐, 볼보, 도요타 등 많은 완성차 브랜드들은 불참했습니다. 행사 최대지분을 가진 그룹 수장의 등장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정 회장은 메르세데스-벤츠, BMW 등 수입차 브랜드 부스를 들른 뒤 현대차그룹 계열사 부스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던 듯합니다. 이날 정 회장의 동선을 살펴보면, 향후 현대차가 어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의선은 왜 테슬라 부스를 찾았나 현재 글로벌 완성차 회사들의 최대 관심사는 전기차입니다. 기존 내연기관차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시장의 거대한 물결은 전동화로 급격히 쏠리고 있습니다. 상당수 회사는 속속 내연기관 개발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인 미국이 인플레이션 억제법(IRA)을 내놓고 보조금을 통해 전기차 밀어주기에 나서면서 이 흐름은 한층 가속화됐습니다. ‘전기차는 시기상조’라고 애써 모른 척하던 도요타마저 최고경영자(CEO)를 바꾸고 뒤늦게 전기차 전쟁에 뛰어들겠다고 밝혔습니다.
이 전기차 혁명의 선두 주자는 테슬라입니다. 지난해 테슬라는 전 세계에 131만대의 전기차를 팔며 이 시장이 더는 틈새가 아님을 증명했습니다. 지난 10년간 절치부심 개발해온 자율주행도 타사 대비 앞섰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경쟁사들엔 초미의 관심 대상입니다.
정 회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테슬라 부스를 찾은 그는 지난달 30일 국내에 출시한 대형 SUV 모델X 플래드를 살펴봤습니다. 기아가 이 행사에서 공개한 EV9과 경쟁할 모델입니다. 모델X 플래드는 압도적 성능을 보유한 ‘괴물 전기차’입니다. △최고 출력 1020마력 △최고속도 시속 240㎞ △제로백 2.6초 △주행거리 430㎞입니다.
3열 좌석을 포함 성인 7명이 탑승할 수 있고, 뒷좌석을 접으면 최대 2614리터의 적재 공간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뒷좌석의 ‘팰컨 도어’는 아이들을 태우기 쉽게 문이 하늘 위로 열립니다.
“임원들은 테슬라 직접 타봐라” 작년 12월 조선일보는 현대차·기아 임원들이 테슬라 차를 타고 서울 양재동 사옥을 출퇴근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정 회장이 “임원들이 테슬라를 직접 타보고 장단점을 보고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입니다. 보도에 따르면 현대차는 모델3와 모델Y 60여 대를 리스했고 임원 1인당 1~3개월간 빌려줬습니다. 이 시승 행사는 200명 임원을 대상으로 1년간 진행된다고 합니다.
타사 차량 이용을 꺼리는 보수적인 완성차 회사 문화에서 이례적인 사건입니다. 자존심은 접어두고 전기차 1등 회사를 철저히 배우겠다는 의도입니다. 당시 이 뉴스는 테슬라 커뮤니티에서도 화제가 됐습니다. 일각에선 2007년 애플의 ‘아이폰 쇼크’ 이후 몰락한 노키아의 휴대폰 사업을 예로 들며, 현대차가 전기차라는 대세를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현대차그룹 임원과 직원들이 서울모빌리티쇼 테슬라 부스에 잇따라 방문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입니다. 지난달 30일 송호성 기아 사장은 모델Y를 직접 타보며 “어떤 게 좋고 불편한지 우리 차와 여러 방면에서 비교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의 꿈 정 회장의 시선을 끈 것은 또 있었습니다. 바로 테슬라봇 ‘옵티머스’입니다. 테슬라가 작년 9월 ‘AI 데이(인공지능의 날)’에 공개한 제품입니다. 당시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2만달러(약 2600만원) 가격으로 3~5년 내 테슬라봇을 수백만 대 생산할 계획”이라며 “인류 문명이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테슬라봇은 작년 11월 중국에 이어 해외 두 번째로 서울모빌리티쇼에 공개됐습니다. 정 회장과 함께 온 현동진 현대차 로보틱스랩장(상무)은 옵티머스에 대해 “아직 다이내믹한 동작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습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정 회장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테슬라봇에 한참 동안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정 회장은 그동안 로봇 기술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현대차그룹은 전통적인 자동차 기업을 넘어 미래 모빌리티 솔루션 회사로 도약하려 합니다. 로봇 기술은 그 변화의 중심에 있습니다. 지난 2021년 현대차가 미국 로봇 기업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정 회장은 당시 사재 2490억원을 투자할 정도로 로봇에 진심이었습니다.
현대차는 서울모빌리티쇼에서 자동차 외에 세 종류의 로봇을 공개했습니다. 그룹의 차세대 모빌리티 연구조직인 로보틱스랩이 개발한 배송 로봇과 전기차 자동 충전 로봇, 그리고 보스턴다이내믹스의 로봇 개 ‘스팟’입니다.
혁신은 어디에서 오는가 정 회장의 관심은 비단 대기업에만 향하지 않았습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시관에선 자율주행차 플랫폼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국내 전기차 중소기업인 마스타전기차 부스에서 장기봉 회장을 만나 “배터리는 어느 회사 것을 사용하고 있나, 판로는 어떻게 개척했는가”라고 물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2018년 설립된 이 회사는 전기차 파워트레인 일부와 디자인을 자체 개발하고 국내 천안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90분간의 관람을 마치고 출구로 나서던 정 회장은 한 부스에서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보스턴다이내믹스의 경쟁사인 고스트로보틱스의 사족보행 로봇 ‘비전 60’을 본 것입니다. 정 회장은 비전 60이 발을 구르고 움직이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그는 수심 1m에서도 작동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로봇 개는 서울모빌리티쇼를 찾은 아이들에게 그 어떤 제품보다 큰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일반 관람객들이 방문한 지난 주말에 현장을 찾은 ‘테슬람 기자’는 수많은 어린이들이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이 로봇 개를 쓰다듬고 환호성을 지르는 걸 지켜봤습니다. 어른들이 번쩍이는 자동차에 정신이 팔린 사이, 아이들은 전기차 충전 로봇을 보며 손뼉을 치고, 테슬라봇과 함께 ‘인증샷’을 찍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었습니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될 무렵엔 지금의 자동차 기업은 아주 많이 다른 모습일지 모릅니다. 정 회장은 그 변화를 주도할 수 있을까요. 그의 이날 동선에 한 번 더 눈이 가게 됩니다.
▶‘테슬람이 간다’는
2020년대 ‘모빌리티 혁명’을 이끌어갈 테슬라의 뒷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최고의 ‘비저너리 CEO’로 평가받는 일론 머스크도 큰 탐구 대상입니다. 국내외 테슬라 유튜버 및 트위터 사용자들의 소식과 이슈에 대해 소개합니다. 아래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면 매주 기사를 받아볼 수 있습니다.
백수전 기자 jerr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