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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의 임기가 8일 끝난다. 그는 3673일 동안 재임하며 최장수 일본은행 총재라는 기록을 세우게 됐다. 구로다 총재는 세계 3대 경제대국 일본을 무대로 세계 중앙은행 역사상 유례없는 ‘실험’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대규모 국채 매입, 마이너스 금리 정책 도입, 장단기 금리 조작 정책 도입 등 전례가 없는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퇴임을 앞둔 지금 그의 정책 성과를 호평하는 전문가는 드물다. ○통화량 늘려도 꿈쩍 않은 디플레이션
구로다 총재는 취임 한 달 만인 2013년 4월 “통화 공급량과 국채 매입 규모를 두 배 늘려서 2년 안에 물가상승률을 2%로 끌어올리겠다”고 장담했다. 일본 경제의 골칫거리인 디플레이션(물가 장기 하락)을 해결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시중에 돈을 살포하겠다는 그의 정책을 시장에서는 ‘구로다 바주카포’라고 부르며 환영했다. 엔화 가치는 떨어지고 일본 증시는 급등했다.
하지만 그의 장담은 현실화하지 못했다. 통화 공급량과 국채 매입량을 두 배 늘리겠다는 약속만 지켰을 뿐이다. 통화 공급량은 2012년 134조엔에서 2022년 646조엔, 일본은행이 보유한 일본 국채는 125조엔에서 556조엔으로 4~5배로 불어났다. 현재 일본의 기대 물가상승률(앞으로 1년간 예상치)은 0.6% 수준이다. 당시 일본은행은 통화량을 10% 늘리면 기대 물가상승률이 0.44% 오를 것으로 분석했다. 돈을 두 배 풀면 물가가 어렵지 않게 2%를 넘길 것으로 내다본 이유다. 구로다 총재도 지난달 “임금과 물가가 오르지 않는다는 사회통념이 예상보다 강했다”고 했다. 2022년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546조엔으로 2012년보다 5% 늘어나는 데 그쳤다. GDP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개인 소비는 2% 줄었다. 실질임금이 2012년보다 5% 감소한 탓이다.
양적완화의 효과가 없자 구로다 총재는 2016년 1월 기준금리를 연 -0.1%로 낮추는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도입했다. 대출을 못 하고 남은 돈을 일본은행에 맡기면 이자는커녕 원금이 줄어들게 될 테니, 은행이 시중에 돈을 더 풀게 하려는 극단적인 정책이었다. 마이너스 금리 도입 후 6년 동안 시중은행의 대출 잔액은 560조엔으로 100조엔 증가했다. 이 가운데 26조엔은 부동산으로 흘러 들어가 도쿄 아파트 가격을 사상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제조업에는 8조엔만 유입됐다. ○고용 개선은 ‘빛 좋은 개살구’구로다 총재는 금융완화가 성공했다는 근거로 고용을 든다. 2012년 4.3%이던 실업률은 2022년 2.6%로 떨어졌다. 하지만 ‘빛 좋은 개살구’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지난해 비정규직 근로자는 2101만 명으로 26만 명 증가했지만, 정규직 근로자는 3588만 명으로 1만 명 늘어나는 데 그쳤다. 비정규직 비율이 전체의 37%다. 일본의 평균 임금이 30년째 정체된 원인도 비정규직 증가에 있다는 분석이다.
구로다 총재의 ‘10년 실험’ 기간에 일본 경제의 기초체력은 쇠약해졌다. 2013년 0.9%이던 잠재성장률은 지난해 0.3%로 떨어졌다. 미쓰비시종합연구소는 2040년께 일본의 잠재성장률이 마이너스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했다. 시라카와 히로미치 크레디트스위스재팬 수석이코노미스트는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이 구로다 총재에게 배운 게 있다면 아무리 돈을 풀어도 국민에게 경제 성장 기대를 심어주지 않는 한 물가는 영원히 오르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