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음악의 진가(眞價)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자리였다. 실험적인 기법과 극적인 표현, 무질서한 진행 속에서 피어나는 정교한 연주는 마치 한 편의 블록버스터 영화를 본 듯한 짜릿한 전율과 깊은 여운을 자아냈다.
지난달 31일 경남 통영 도남동 통영국제음악당에서 개막한 통영국제음악제의 주요 프로그램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TFO) I·II’ 공연 얘기다. 2011년 창단한 TFO는 매년 단원 구성이 달라지는 프로젝트 악단이다. 올해는 현대음악 전문 연주단체 TIMF 앙상블과 영국 로열 노던 신포니아가 단원으로 참여했다.
미국 출신 지휘자 데이비드 로버트슨이 모리스 라벨의 ‘권두곡’(불레즈 편곡 버전)으로 두 시간짜리 공연의 문을 열었다. 로버트슨은 신비로운 목관악기 선율을 따르는 악기군과 이와 완전히 무관한 선율을 연주하는 악기군의 진행을 섬세하게 조율하면서 라벨 특유의 오묘한 조화를 살려냈다.
곧이어 TFO와 중창단인 노이에 보칼솔리스텐 슈투트가르트가 함께 무대를 꾸미는 루치아노 베리오의 ‘심포니아’가 들려왔다. 뉴욕필하모닉이 창립 125주년을 맞아 위촉한 곡으로 20세기 작품 가운데 가장 독창적이고 깊은 인상을 남긴다는 작품이다. 오케스트라 정중앙에 앉은 여덟 명의 성악가가 ‘이’ ‘아’ 등 단순 모음을 길게 끌며 음산한 분위기를 드러내다가도 성부별로 다른 가사를 중얼대며 만들어내는 거대한 악상은 청중의 귀를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사람의 목소리와 관현악이 한데 어우러져 끌어가는 극적인 셈여림 표현과 독특한 억양, 불협화음은 입체적인 인상을 남겼다. 짧게 끊어지는 인성의 음형과 순식간에 숨을 끝까지 불어넣으며 만들어내는 금관악기의 찢어질 듯한 소리에서 비롯되는 박진감은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였다. 말러 교향곡 2번 3악장을 토대로 여타 작곡가의 음악 일부를 덧입힌 3악장에서는 작곡가가 추구한 ‘극으로서의 음악’이 더욱 명확히 살아났다. 단순 모음들이 온전한 문장으로 바뀌면서 역동성을 드러냈다. 끊임없이 주고받는 선율과 휘몰아치는 급진적인 셈여림 변화는 지루할 틈 없는 장대한 음악을 끌어냈다.
찰스 아이브스의 ‘대답 없는 질문’에서는 현악기가 정적인 선율을 연주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트럼펫의 기묘한 선율과 날이 서 있는 목관악기의 선율이 대립하면서 기존의 틀을 부정하고자 했던 작곡가의 의지를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이후 진은숙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의 영감 원천이자 시벨리우스 콩쿠르, 파가니니 콩쿠르에서 모두 우승한 거장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다스 카바코스가 등장하자 환호가 쏟아졌다.
그가 택한 작품은 3대 바이올린 협주곡 중 하나인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카바코스는 직선으로 길게 뻗어나가는 명료한 음색과 강렬한 터치로 브람스 특유의 묵직한 서정을 온전히 살려냈다. 활을 아주 빠르게 내려치면서 격정적인 화음을 쏟아내다가도 한순간에 모든 움직임을 줄인 채 애절한 선율을 뽑아내는 솜씨는 일품이었다.
홀로 등장하는 카덴차(무반주 독주)에서는 한 음도 허투루 내지 않는 집중력과 음역에 따라 음색까지 변화시키는 기교로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을 선사했다. 응축된 음악적 표현을 증폭시키면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뿜는 그의 연주는 우레와 같은 함성을 이끌기에 충분했다.
이튿날 열린 TFO 두 번째 공연에서는 윤이상의 ‘교향악적 정경’이 아시아에서 초연됐다. 윤이상이 유럽에서 쓴 첫 번째 오케스트라 작품인데, 초고난도 기교와 실험적 기법으로 1961년 세계 초연 후 좀처럼 듣기 어려웠던 곡이다. 세밀한 터치의 고음 트레몰로(한 음을 빠르게 되풀이하는 연주)로 작품의 후경을 써내는 현악기 위로 짧은 음형을 무질서하게 내려놓는 듯한 악단의 긴밀한 호흡은 묘한 긴장감을 조성했다.
각 악기군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행하면서 혼란스러운 인상을 주다가도 금관악기를 중심으로 서서히 하나의 선을 이루면서 극적인 악상을 드러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선 거친 음색으로 모든 음을 떨어뜨려 버리는 연주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캔버스에 물감을 떨어뜨리고 휘갈기는 듯한 악상을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한 윤이상의 의도가 생생하게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통영=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