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자산 규모 1000억~2500억달러 은행들에 대한 관리 감독을 다시 강화하라고 금융 당국에 지시했다. 최근 벌어진 실리콘밸리은행(SVB)과 시그니처은행의 파산 원인이 느슨해진 은행 감독에 있다고 보고 대응에 나선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도입했다가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가 완화한 ‘도드-프랭크법’을 재정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는 평가다. ○美 지역은행 감독 강화
30일(현지시간) 백악관은 “자산 1000억~2500억달러 규모 은행을 대상으로 이전 행정부가 완화한 규칙을 복원한다”며 이 같은 내용의 권고안을 발표했다. 백악관은 “불행하게도 트럼프 행정부의 규제 당국은 SVB와 시그니처은행 등 대형 지역은행에 대한 상식적인 요구사항과 감독을 약화했다”며 “은행 시스템을 강화하고 미국의 일자리와 중소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이를 뒤바꿔야 한다는 것이 바이든 대통령의 판단”이라고 밝혔다.
먼저 백악관은 자산 1000억달러 이상 지역은행에 유동성을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 위기 발생 시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을 감당 가능해야 파산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취지에서다. 중견 은행들이 2년에 한 번 하던 스트레스 테스트(재무건전성 평가)는 매년 받도록 했다. 은행들은 이번 사태 같은 위기 상황에서 급격한 자금 유출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양질의 유동자산을 보유해야 하고, 이를 잘 준수하는지 금융 당국이 더 자주 감시하겠다는 의미다.
해당 은행들은 위기 상황을 가정했을 때 금융 시스템 전반으로 리스크를 확산시키지 않기 위한 자구책을 담은 ‘정리의향서(living wills)’도 제출해야 한다. 유언장이라는 뜻을 담은 정리의향서는 금융기관이 위기 상황에서 세금 등으로 조직을 회생시키거나 금융시장에 충격을 주지 않고 청산하는 방안을 담은 계획서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은행에 대한 감독과 규제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옐런 “MMF·가상화폐도 규제해야”이번 권고사항은 대부분 도드-프랭크법을 기반으로 한다. 도드-프랭크법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미국이 2010년 도입한 강력한 금융 규제다. 당시 오바마 행정부는 자산 500억달러 이상인 은행을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금융회사(SIFI)’로 지정해 매년 스트레스 테스트를 받게 했다. 자기자본으로 리스크가 높은 투자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볼커 룰’도 이때 생겼다.
2018년 트럼프 행정부 당시 공화당과 민주당 의원들이 도드-프랭크법을 대폭 수정하면서 은행에 대한 금융당국 규제도 완화했다. SIFI에 지정되는 은행 자산 기준을 500억달러에서 2500억달러로 높여 미국 초대형은행 12곳을 남기고 대부분 은행이 규제 대상에서 벗어났다. 자산 100억달러 미만 은행들은 볼커 룰 적용도 받지 않게 됐다.
최근 SVB에 이어 시그니처은행의 파산으로 미국 금융시장이 충격에 빠지면서 도드-프랭크법 완화가 은행 부실을 야기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지난해 말 기준 자산 규모가 2090억달러인 SVB와 1104억달러인 시그니처은행 모두 규제 완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백악관과 미국 금융당국은 도드-프랭크법 개정 없이 하위 규정만 바꾸는 방식으로 이번 권고사항을 만들었다. 공화당이 하원을 장악한 상황에서 의회 동의 없이도 권고사항을 실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앞으로 금융당국이 대대적으로 도드-프랭크법을 개정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날 재닛 옐런 미 재무부 장관도 백악관의 의지에 힘을 실었다. 블룸버그 등에 따르면 옐런 장관은 “2008년 이후 도입된 금융개혁을 약화시킨 규제 완화가 지나쳐 최근의 은행 위기를 야기했을 수 있다”며 “현재의 감독체계가 적절한지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유정 기자 yjr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