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의 경영공백 상태가 장기화할 전망이다. 대표이사 후보는 물론 이사진 6명 중 5명이 잇달아 사퇴하면서 4월부터 KT 이사회에는 단 한 명만 형식적으로 남게 됐다. 새 대표이사 선임에는 최소 5개월이 걸린다고 회사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아무리 빨라도 가을에나 새 경영진이 꾸려진다는 뜻이다.
31일 서울 우면동 KT연구개발센터에서 열린 KT 주주총회에는 총 8개 의안이 올라왔으나 이 중 대표이사 선임의 건(1호), 이사 선임의 건(4호), 감사위원회 위원 선임의 건(5호), 경영계약서 승인의 건(7호)이 모두 자동 폐기됐다. 경영진 구성에 관한 안건이 모두 사라지면서 주총은 불과 44분만에 끝났다.○경영진·이사회 관련 안건 4건 자동폐기이날 오전 현직 사외이사인 강충구 고려대 교수(KT 이사회 의장)와 여은정 중앙대 교수, 표현명 전 롯데렌탈 대표는 임기 1년 사외이사 후보에서 사퇴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이들의 임기는 이날부로 종료됐다.
이들의 사퇴 결정에는 KT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지분 10.12%)의 의결권 행사 방침 발표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국민연금은 전날 표 사외이사 후보에 대해서 반대 입장을, 나머지 두 후보에 대해서는 중립 의견을 냈다. 중립은 다른 주주들의 찬반 비율에 따라 국민연금 지분을 나눠 계산한다는 의미다. 가령 찬반 비율이 6대 4일 경우 국민연금의 주식을 해당 비율만큼 나눠 산정하는 식이다. 2대 주주인 현대차그룹(지분 7.79%)은 사외이사 3명에 대해 모두 반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초 구현모 현 대표에 이어 윤경림 KT 그룹트랜스포메이션 부문장이 차기 대표이사 최종 후보에 올랐지만 정치권의 압박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것도 사임에 영향을 줬을 것으로 보인다.
KT는 지난 28일 박종욱 경영기획부문장(사장)을 대표이사 직무 대행으로 지정하고 비상 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지난 정권과 관련이 있는 김대유·유희열 사외이사도 이날 사퇴했다.
KT는 비상 경영위원회 산하 '뉴 거버넌스 TF'를 통해 사외이사 선임과 대표이사 선임을 순차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대표 선임까지 약 5개월이 걸릴 것으로 KT는 예상한다.
사외이사가 잇달아 사임하면서 KT 이사회에는 헌법재판소 사무처장 출신인 김용헌 사외이사만 남게 됐다. 다만 KT 정관상 사외이사 후임이 없을 경우 새로운 사외이사가 선임될 때까지 기존 사외이사가 이사 대행을 하도록 한 만큼 이사회 운영은 가능하다는 것이 KT의 설명이다.
네덜란드 연기금 APG와 경제개혁연대가 요구한 자사주 처분에 관한 정관 변경 등 나머지 4개 안건은 원안대로 통과됐다. APG 등은 KT가 현대자동차와 신한금융(신한은행) 등과 서로의 자사주를 사주는 형태로 상호주를 맺은 점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이러한 처분이 주총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의안 3-3호)해서 받아들여졌다.
○주주들 "낙하산 방지 정관 만들어달라"이날 주총은 KT새노조, KT주주모임 등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해 저마다 발언권을 요구하느라 대단히 소란스러운 가운데 진행됐다. 네이버 까페 'KT주주모임'을 이끌고 있는 남성(아이디 알바트로스)은 주총장에서 배당 및 자사주 소각과 같은 주주환원 정책을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그는 또 "KT에 정부의 외압이 매번 일어난다는 것에 대해 개인 주주들은 굉장히 분노하고 있다"며 "다음 임시주총 등에서 비전문가 정치인 등이 KT의 요직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KB국민은행 사례 등을 참고해서 정관을 변경해 낙하산 인사를 막아 달라"고 강조했다. 그는 현대자동차와 현대모비스를 통해 KT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현대차그룹에 대해서도 비판하며 "상호 주식교환을 한 관계이면서 KT의 비상사태에 대해 언론플레이한 것에 분노한다"며 "안전장치를 마련해달라"고 요구했다.
박 대행은 "정관변경 제안을 뉴 거버넌스 TF에 전달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구현모 대표와 윤경림 대표이사 후보의 사퇴 배경을 밝혀달라는 요청에 대해선 "배경을 파악하지 못했다"며 답변을 피했다.
서울 목동에서 왔다고 밝힌 한 주주는 "중요한 건 다 나가리가 난(어그러진) 것 같다"며 고성이 이어지는 주총장이 피로하다는 듯이 회의 종료를 요청했다. 그러나 주총이 끝날 때까지 발언권을 얻지 못한 일부 주주들은 갑작스러운 폐회 선언에 분개하며 "(발언권을 준다고 했는데 얻지 못했다며)이것은 사기다"거나 "면담을 요청한다"고 소리를 치기도 했다.
민주노총 계열 소수노조인 KT새노조 관계자들은 장내외에서 박종욱 대행을 포함한 현 경영진이 '비리 경영진'이라고 질타하며 통신 공공성을 아는 사람이 대표로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미영 KT새노조 위원장은 "이석채 전 회장과 같은 낙하산 인사가 와서 KT를 더 이상 망치도록 할 수는 없다"며 "낙하산 반대에 관한 특별결의를 박수로 통과시켜달라"고 했으나 호응은 크지 않았다.
이상은/이승우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