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동북부에 있는 빌바오는 30년 전만 해도 ‘죽은 도시’였다. 도시를 먹여 살리던 철강·조선산업이 쇠퇴하면서 사람과 돈이 빠져나간 탓이다. 이로 인해 한때 실업률이 30%를 웃돌기도 했다. 이랬던 빌바오는 1997년을 기점으로 세계적인 관광지로 다시 태어나기 시작했다. 일등공신은 이때 문을 연 구겐하임미술관이었다.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멋진 건물과 그 안을 가득 채운 거장의 작품을 보기 위해 매년 100만 명 넘는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
2020년 경북 예천군이 ‘단색화 거장’ 박서보 화백의 미술관 건립 계획을 발표하면서 빌바오 사례를 내세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루이비통이 뽑은 ‘글로벌 대표 현대미술가 6인’이자 그림 하나가 수억원에 팔리는 ‘예천이 낳은 세계적 거장’의 미술관을 세워 국내는 물론 해외 관광객도 끌어들인다는 목표였다. 박 화백도 흔쾌히 동의했다. 하지만 최근 박 화백이 제주도 특급호텔(JW메리어트 제주)에 2024년 박서보미술관을 건립하기로 하면서 예천군의 꿈은 사실상 무산됐다. 그동안 예천군과 박 화백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건축법에 발목 잡힌 예천군
문제의 시작은 건축법이었다. 박 화백은 2020년 예천군에 미술관 건립을 승낙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스위스 건축가 피터 줌터에게 미술관 설계를 맡길 것.’ 줌터는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거장이다. 하지만 건축서비스산업진흥법은 특정인을 콕 찍어 공공건축물 설계를 맡기는 걸 금지하고 있다. ‘공공기관이 건축물 설계를 발주할 경우 공모 방식을 우선 적용해야 한다’는 조항 때문이다.
예천군은 줌터 측에 “공모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단번에 거절당했다. 건축계 관계자는 “줌터 같은 특급 건축가는 전 세계에서 ‘러브콜’을 받는다”며 “그런 대가가 서울도 아니라 예천에서 발주하는 건축 설계 공모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리 있겠는가”라고 지적했다.
턱없이 적은 설계비도 발목을 잡았다. 국토교통부는 공공건축물 설계비를 세세하게 규정한다. 총사업비를 250억원으로 책정한 예천 박서보미술관의 설계비는 전체의 5%인 약 12억원이다. 예천군 관계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 기준을 넘겨서 설계비를 지급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건축가를 데려오기엔 턱없이 부족했다는 얘기다.
예천군의회의 반대도 한몫했다. “시골 마을에 이렇게 큰돈을 들여 미술관을 왜 짓느냐”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인 군민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판 빌바오’는 불가능
군 예산으로 박서보미술관을 건설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예천군은 한때 모금 방식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렇게 되면 줌터와 수의계약을 해도 되고, 설계비 상한 규제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5만 명이 사는 시골 마을에서 수십억~수백억원을 끌어모으는 건 처음부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예천 박서보미술관 사업이 지지부진해지자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게 JW메리어트다. 박 화백 측에 “조만간 서귀포에 문을 여는 JW메리어트 제주에 박서보미술관을 짓자”고 제안한 것. 그리곤 박 화백이 설계자로 추천한 스페인 건축가 페르난도 메니스를 영입하기 위해 JW메리어트 고위 관계자가 직접 스페인으로 날아가 그를 설득한 것으로 전해졌다. 예정대로 되면 박서보미술관은 2024년 JW메리어트 제주 내 1만1571㎡ 부지에 지상 1층(로비), 지하 1~2층(전시관) 규모로 들어선다.
‘예천군-박 화백’과 비슷한 사례는 2012년에도 있었다. 경남 함안군은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이우환 화백의 생가를 개조해 미술관으로 꾸미려고 했지만, 예산 부족 등으로 흐지부지됐다. 그사이 이 화백의 미술관은 부산에 들어섰다. 2008년 전남 고흥군은 천경자미술관을 세우려다가 포기했다. 설계자 공모 방식 등을 놓고 천 화백의 딸과 고흥군 사이에 이견이 생긴 탓이다.
정준모 미술평론가는 “공공건축물의 설계자를 공모 방식으로 제한한다는 건 정부가 건축물을 ‘작품’이 아니라 ‘건물’로만 본다는 의미”라며 “한국판 빌바오를 꿈꾼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규제부터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