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한다.”
피에르 상소의 책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첫머리에 인용된 파스칼의 문장이다. 방배동의 한 카페 창가에 앉아서 친구를 기다리다 제목에 끌려 집어 든 책인데 앉은 자리에서 절반을 읽어버렸다. 커피가 식어 갈수록 나는 만족감에 차올랐다. 어떤 문장은 읽는 것만으로도 완전한 만족감을 준다. 이제는 좀 쉬고 싶다고 생각할 때, 나에게 당장 휴식하라고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이런 문장은 또 어떤가. “만일 인간과 장소와 계절이 섬세하고 은밀하고 감동적으로 조화를 이루었을 때 시정이 태어나는 것이라면, 포도주를 마시는 그 자체가 시적인 행위임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나를 옹호해주는 글을 읽는 기쁨이 온몸을 휘감는다. 술을 좋아하는 시인에게 술을 마시는 그 자체가 시적인 행위라고 말하며, 그러니 어서 술을 먹으라고 속삭이는 문장들.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대변인을 만난 것처럼 즐거웠다.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일할 의욕이 생기는 나 같은 사람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는 소리를 평생 들으며 살았다. 그런데 시간생물학자들이 사람마다 각자 고유한 수면 패턴이 있고 하루 중 가장 효율적인 업무 시간이 제각기 다르다고 말하는 책을 읽는 것만큼 기분 좋은 독서는 없을 것이다.
얼마 전 친구와 제주도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오전 7시25분 비행기여서 6시까지 공항에서 친구와 만나기로 했는데 비행기 탑승시간 10분 전까지 오지 않는 친구 때문에 발을 동동 굴렀다. 다행히 탑승하긴 했지만 한 시간 넘게 친구를 기다리며 마음 졸인 생각을 하면 불쑥불쑥 짜증이 올라왔다. 제주도 세화 해변 근처에서 책방 시타북빠를 운영하는 함돈균 평론가를 만나서까지 공항에서의 일을 하소연했다. 그도 내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 주리라 예상했는데 의외였다.
“공항은 기다림의 장소야.”
함 평론가는 자신의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 영화 ‘터미널’에서 보여준 기다림의 철학까지 풀어놓기 시작했다. 내내 시무룩하던 친구는 그날 중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며 처음 만난 평론가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자신을 옹호하는 생각을 만났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저렇게 예쁜 미소를 감춰뒀었구나. 그제야 내내 마음이 불편했을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언제는 기다리는 마음 덕분에 눈 내리는 날이 아름다워지는 것이니, 기다림이 있기에 평범한 날도 소중해지는 것이니 하는 글을 써놓고는 이제 와서 기다림은 짜증이 나는 일이라고 쓰게 될 줄이야 … .
상소의 말이 맞았다. 포도주는 지혜의 학교다. 알코올은 내게 아무도 보지 못한 풍경을 주고, 불가능한 것을 믿고 싶은 환상을 준다. 어느새 마음이 다 풀어졌다. 포도를 잘게 으깨고 으깬 것을 체로 걸러 오크통에서 발효시키는 동안, 포도주란 글자엔 기다림이란 천사가 숨어들었을 것이다. 보랏빛이 붉은빛으로 몸을 바꿀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 기다림 속에서 100년이 된 와인도 있고 200년이 된 와인도 있겠지. 그에 비하면 나의 기다림은 얼마나 짧은가.
공항에서도 낭독회에서도 강의실에서도 나는 기다린다. 기다리는 게 일이다. 오늘 밤엔 비 소식이 있다. 농부와 산불 감시원은 이 비를 기다린다. 나는 와인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무엇인가 쓰고 싶게 하는 마음을 기다린다. 이렇게 기다리다 보면 꽃이 오고 새가 오고, 초록으로 무성해지는 여름이 오겠지. 기다림은 벌이 아니다. 기다림은 시를 움트게 하는 성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