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총액 52조원을 일주일 만에 ‘증발’시킨 테라·루나 사태, 기억하시나요. 테라와 루나의 발행사인 테라폼랩스의 권도형 대표가 도피 약 1년만에 체포됐습니다. 권씨는 한때 가상자산 업계의 천재로까지 불렸으나, 테라와 루나 가격이 폭락하며 한 순간에 사기 혐의를 받는 범죄자가 됐는데요.
어쩌다 전도유망하던 코인인 테라·루나는 하루 아침에 휴지조각이 됐을까요? 권씨에겐 사기 혐의가 적용됐는데, 혹시 투자자들이 제기하는 의혹처럼 테라·루나 프로젝트가 ‘폰지 사기’였을 가능성도 있는 걸까요?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서로가 서로의 가격을 떠받치는 테라와 루나의 독특하고도 불안정한 구조를 살펴봐야 합니다. ○“1억원이 1000원 됐다”
루나가 폭락하기 전, 루나의 전성기 시절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루나는 지난해 4월까지만 해도 암호화폐 시가총액 순위 10위권 내에 들었습니다. 루나 코인 1개 당 15만원을 넘어서 시가총액도 50조원을 웃돌았죠. 삼성바이오로직스, 네이버 시총에 맞먹는 규모입니다.
지난해 5월 초까지만 해도 10만원대 수준이던 루나는 급격히 하락해 5월 12일에는 1원대로 떨어졌습니다. 당시 한 암포화폐 커뮤니티에는 “루나가 14만원일 때 1억원 투자했으면 지금은 1128원, 담배 5가치 값 된 것”이라며 “30억원 투자했으면 3만3800원, 치킨에 맥주 값”이라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이튿날 루나는 사실상 휴지조각이 됐습니다. 곧 세계 최대 가상화폐 거래소인 바이낸스는 이날 루나를 상장폐지한다고 밝혔고,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 업비트와 빗썸도 루나의 상장폐지를 결정했습니다.
○루나로 테라 가격 1달러에 고정할 수 있다?루나가 폭락한 과정을 이해하려면, 루나와 자매코인인 테라 코인을 살펴봐야 합니다.
테라는 ‘스테이블 코인(Stable Coin)’입니다. 직역하면 안정적인 암호화폐라는 뜻인데요. 즉 원화나 달러와 같은 법정화폐로 표시한 코인의 가격이 거의 변동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가격 널뛰기가 심한 암호화폐의 특성을 보완한 코인으로, 테더가 대표적이죠.
테더와 마찬가지로 테라도 가격이 언제나 1달러에 고정되도록 설계됐습니다. 이렇게 가격을 고정하는 행위를 못을 박는다는 의미의 ‘페깅(pegging)’이라고 합니다. 가장 일반적인 페깅 방법은 테더처럼 현금과 국채 같은 안전자산을 담보로 하는 겁니다. 혹시 테더 가격이 1달러 밑으로 내려가도 달러 준비금을 이용해 투자자에게 돈을 지급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거죠.
테라의 특이한 점은 이런 안전자산 담보가 없다는 점입니다. 담보가 없다면 투자자들은 테라 1개가 언제나 1달러를 유지할 거라는 믿음을 어떻게 가질까요? 여기서 자매코인 루나가 나옵니다. 루나와 테라를 연동시킨 시스템으로 코인의 공급량을 조절한다는 계획인데요.
테라 1개는 언제나 1달러어치의 루나와 교환됩니다. 루나는 일반 암호화폐처럼 가격이 변동하기 때문에, 1달러 어치의 루나 양은 그때그때 달라지겠죠. 테라 가격이 1달러 아래, 예를 들어 0.8달러로 떨어졌다고 해보겠습니다. 0.8달러 가치를 가진 테라 1개로 1달러 어치의 루나를 받을 수 있으니, 투자자는 0.2달러를 이득 봅니다. 시중에 있는 테라는 수거되고, 공급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테라 가격이 올라가 1달러로 복귀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테라 가격이 1달러를 넘어가면 발행사에서 루나를 사들이고 테라를 풀면서 테라 가치를 떨어트리는 식입니다. ○믿음 무너지자 ‘패닉셀’말이 되는 시스템처럼 보이지만, 투자자들의 믿음이 무너지자마자 시스템은 금세 파괴됐습니다. 지난해 5월 9일 테라의 1달러 선이 붕괴된 것을 기점으로 테라의 가격 안정성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일제히 공황매도, ‘패닉셀’이 시작된 겁니다.
너무 많은 투자자들이 일제히 테라를 팔면서 테라와 루나가 함께 하락했고, 시세를 방어할 수 없게 됐습니다. 테라 보유자들은 테라 1개를 곧바로 1달러로 바꿀 수 없는 구조입니다. 1달러에 상응하는 루나로 바꿀 수 있을 뿐인데, 갑자기 매도세가 몰리면 테라를 루나로 바꾸는 와중에도 루나 가격이 실시간으로 떨어집니다. 루나와 테라가 서로 가격을 유지해주는 구조가 작동할 새가 없는 거죠. ○20% 이자수익률...폰지사기 아닌가
업계에서는 폭락 이전부터 테라·루나가 ‘폰지사기’일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제시됐습니다. 늦게 진입한 투자자의 돈으로 앞서 진입한 투자자에게 돌아갈 돈을 지급하는 ‘돌려막기’ 아니냐는 건데요.
우선 별도의 안전자산 준비금 없이 또다른 자체 발행 코인으로 기존 코인의 가치를 뒷받침하는 구조가 취약하다는 지적입니다. 발행사에서는 이런 비판을 의식해 앞서 35억달러(4조4500억원) 규모의 비트코인을 매입해 2차 안전망 역할을 할 준비금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비트코인을 판 돈으로 테라를 매입해 테라 가격을 안정화 시키기에는, 이번 매도세가 너무 거센 상황입니다.
테라의 높은 이자수익률도 의문의 대상이었습니다. 발행사는 테라를 구매해 예치하면 연 20%에 달하는 수익을 지급했습니다. 제도권 은행 수익률은 물론이고, 테라와 같은 탈중앙화금융 프로젝트 업체들의 수익률(3~5%)도 훌쩍 뛰어넘는 수준입니다. 물론 투자자가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겠죠.
문제는 이 20% 이자가 어디서 오냐는 겁니다. 발행사는 기존 은행과 똑같은 원리로, 예치된 테라를 대출해준 후 발생한 이자와 대출자들이 담보로 맡긴 루나 등을 예치해서 발생하는 이자로 지급한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자율이 너무 높기 때문에 외신에서는 실제로 지속될 수 있는 이자 창출 구조가 있는지 지적해왔는데요. 결국 나중에 진입한 사람의 돈으로 먼저 진입한 사람의 수익률을 떠받쳐야 하는 구조라는 거죠.
폭락 이전부터 블룸버그는 “불과 1~2년 전 더 높은 이자를 제공했던 프로젝트들 중 남은 프로젝트가 거의 없다”면서 “3~5%의 이자를 제공하는 타 업체와 비교했을 때 이 이자가 지속가능한지에 대해 의문이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가상자산 전문 매체인 코인 텔레그래프도 “예치된 테라를 대출하는 차용자보다 20% 이자 수요자가 많기 때문에 이 설정에는 큰 불균형이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뉴욕 검찰, 증권사기 등 8개 혐의로 기소
결국 테라·루나 프로젝트는 무너졌고, 검찰 수사를 피해 도망치던 테라폼랩스 대표 권도형씨도 붙잡혔습니다. 몬테네그로의 수도 포드고리차에서 검거된 건데요. 경찰청은 “인터폴에 신청해 발부된 적색수배에 따라 몬테네그로에서 권 대표로 의심되는 사람을 검거했다”고 지난 23일 밝혔습니다. 미국 뉴욕 검찰은 같은 날 권씨를 증권사기, 인테넛뱅킹을 이용한 금융사기, 시세조작 등 총 8개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지난달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권씨와 그가 창업한 가상화폐 테라·루나 발행사 테라폼랩스를 사기 혐의로 제소한 바 있습니다. 서울남부지검 금융범죄합수단은 이보다 앞선 지난해 9월 테라·루나를 증권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하고 권씨에게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습니다. 합수단은 체포영장을 발부받은 뒤 권씨를 추적해왔고, 인터폴에 공조를 요청해 적색수배를 내려놓은 상황이었습니다. 검찰은 권씨를 확보하기 위해 몬테네그로 당국과 송환 절차를 밟을 예정입니다.
최예린 기자 rambut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