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5월 30일부터 닷새간 서울 여의도 광장에는 320만 명이 몰려들었다. ‘미국 개신교계 대부’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한국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에 전국 각지의 교인이 너나 할 것 없이 이곳을 찾았다. 초여름 햇살이 여의도 광장의 아스팔트를 달궜지만 교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110만 명이 모인 마지막 날의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는 한국 개신교계의 상징적 사건이다.
김장환 극동방송 이사장(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 목사)은 당시 그레이엄 목사의 통역을 맡았다. 그로부터 50년. 빌리 그레이엄 재단(BGEA)과 극동방송은 오는 6월 3일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대규모 기념행사를 연다. 행사에는 그레이엄 목사의 손자인 로이 그레이엄 BGEA 부회장(사진)이 참석한다.
로이 부회장을 지난 20일 서울 상수동 극동방송 본사에서 만났다. 그는 극동방송 초청으로 방한해 국내 개신교 목회자들을 만났다. BGEA의 아시아총괄을 맡은 빅터 햄 목사도 함께했다.
로이 부회장은 “1973년 전도대회는 제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지만,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에게 광장을 메운 인파와 열정적인 한국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웃었다. 당시 그레이엄 목사는 군중을 뚫고 걸어가며 인사할 수 없어 헬리콥터를 탄 채 땅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는 “이번 방한 때 몇몇 교회를 찾았는데, 할아버지에게 전해 들은 한국 사람들의 열정을 실감했다”며 “(코로나 방역정책 완화로) 마스크를 완전히 벗은 서울의 모습이 기다려진다”고 했다.
햄 목사는 기념대회의 의미를 설명하며 ‘회복’과 ‘희망’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그는 “코로나 발생 초반에 한국을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공항이 텅텅 비어 달에 착륙한 기분이었다”며 “팬데믹을 겪으며 인간은 고립과 외로움, 두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이어 “교회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교회의 역할”이라고 덧붙였다.
로이 부회장은 지난 17일 기념대회 준비위원회에 참석해 “저는 한국에 오는 걸 사랑하는 사람”이라며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평양에 있는 기독교 학교를 다니셨는데, 남한과 북한이 하나 되기를 함께 기도하곤 하셨다”고 말했다. 그의 할머니, 즉 그레이엄 목사의 부인인 루스 그레이엄 여사는 선교사의 딸로, 평양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로이 부회장이 20년 넘게 몸담았던 국제구호단체인 사마리안 퍼스는 북한 주민들에게 인도적 지원을 지속해왔다. 기독교인에게 봉사와 실천이 중요한 이유는 뭘까. 그는 “기독교인들이 봉사하며 살아야 교회 밖의 사람들이 보고 ‘기독교인들은 다르구나’ 하는 걸 느낄 것”이라고 했다.
6월 3일 기념대회 때 극동방송은 1973년 여의도 전도대회에 참석한 이들을 다시 초청할 예정이다. 그레이엄 목사의 장남인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가 강론을 맡는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