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스러웠던 객석이 조용해지자, 말쑥하게 차려입은 신사가 무대 앞으로 걸어 나왔다. 클래식 색소포니스트 브랜든 최. “올 10월 한경아르떼필하모닉과 협연한다”는 그는 클래식 공연장에선 좀처럼 듣기 힘든 감각적인 목소리로 오늘 공연을 소개했다. 이 낯설지만 신선한 기운이 공연장을 밝은 기운으로 감싸며 연주에 대한 기대를 한껏 높였다.
마에스트로 서진이 이끄는 한경필의 사운드는 이렇게 시작했다. 첫 곡인 베토벤의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서곡은 지나치게 크거나 억세지 않은 화음으로 시작했다. 전원적인 뉘앙스를 머금은 선율이 바이올린과 목관악기를 통해 흘러나오며 본격적인 빠르기의 주제 선율에 에너지를 더했다. 플루트와 오보에, 클라리넷의 ‘유니즌’(하나의 음)과 함께 한경필의 바이올린 파트는 기민함과 추진력을 동시에 발산했다.
한경필이 요즘 한국 오케스트라 지도에서 급부상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담대한 협주곡 선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좀처럼 선택하기 힘든 협주곡 레퍼토리를 꾸준하게 선보이며 청중에게 새로운 작품에 대한 흥미를 건네고 있어서다. 음악적 해석은 물론 연주 자체도 난해한 슈만의 첼로 협주곡을 두 번째 곡으로 선택한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연주 또한 상당히 괜찮았다.
살구빛 드레스와 은빛 구두로 봄기운을 담아낸 첼리스트 이정란의 역할이 컸다. 1악장에서 등장하는 첼로 파트의 초절기교와 복잡한 감정선의 교차를 자연스럽게 소화해냈다. 슈만이 행복했던 시절에 내놓은 대표곡을 활력 있게 그려냈다. 한경필의 사운드가 간혹 솔리스트와 어긋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지휘자가 노련하게 흐름을 잡아당겨 오히려 긴장감을 주는 추진력으로 치환시켰다.
백미는 2악장에서의 첼로 솔로파트였다. 정중동의 에너지와 단아한 음색으로 깊은 페이소스를 자아낸 이정란의 기량은 감탄스러웠다. 마지막 론도 악장으로 접어들며 지휘자는 절제력 있는 템포와 적절한 음량의 대비를 통해 솔리스트의 질주에 근사한 음악적 쾌감을 더했다.
2부에서 연주한 드보르자크 교향곡 8번의 주인공은 지휘자였다. 서진의 성숙하면서도 발전된 음악 세계가 빛을 발한 연주였다. 짙은 호소력과 드라마적인 설득력이 일품이었다. 특히 첼로 파트의 고급스러우면서도 울림이 큰 음향과 이를 한 결로 받아내는 비올라 파트와의 앙상블이 매력적이었다.
악장을 거듭할수록 한경필의 음향과 앙상블은 한층 정교해졌다. 2악장에서는 유려한 흐름과 굽이가 큰 디테일을 정교하게 조탁해내 중부 유럽 악단에서나 느낄 수 있을 법한 음악적인 만족감을 이끌어냈다. 서진은 3악장에선 하나의 리듬 안에서도 강세 정도를 구분해 강조하고 각 파트의 소리 하나하나를 충실히 모아 소프트한 운무감과 자연의 색채감을 모두 살려냈다.
이처럼 똑부러진 서진의 해석에 부응하는 한경필의 기량은 마지막 4악장에서 불꽃을 튀길 정도로 폭발했다. 성의 있고 확신에 찬 금관의 추진력과 집중력 높은 혼의 맹활약은 잊을 수 없는 이날의 명장면이었다. 다만 목관 파트의 음향 밸런스는 조금 잡아나가야 할 부분으로 보였다.
박제성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