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살이 6년째인 스물일곱 나영에게 삶은 팍팍하기만 하다. 작가의 꿈을 가지고 강원 강릉에서 상경했지만, 현실에 치여 꿈은 멀어진 지 오래다. 책이라도 가까이하고 싶어 제일서점이란 곳에 판매사원으로 취업했지만, 이곳도 만만찮다. 자수성가의 아이콘이라는 사장은 툭하면 자기 자랑에, 반말에, 보상 없는 연장 근무를 강요하기 일쑤다. 급기야 사장은 자본금을 사채시장에 빼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직언하는 15년 차 직원 김지숙에게 ‘그렇게 대들 거면 당장 나가라’고 고함을 친다. 이에 지숙은 체념한 듯 짐을 싼다. 보다 못한 나영이 ‘이건 부당해고예요!’라고 반발해 보지만, 사장은 ‘해고는 무슨! 이건 김지숙 스스로 선택한 권고사직이다!’라고 응수한다. 결국 지숙은 쓸쓸히 서점을 떠나고, 사장의 눈 밖에 난 나영은 다음날부터 물류창고로 출근해 책에 쌓인 먼지나 털라는 명을 받는다. 지친 몸으로 퇴근해 달동네 자신의 월세방 앞에 선 나영은 속정 깊은 이웃들 앞에서 참았던 울음을 토해내는 것으로 그 억울함을 달랜다.
2005년 초연 이후 현재까지 대학로에서 많은 사랑을 받는 뮤지컬 ‘빨래’의 한 장면이다. 과연 제일서점 김지숙 씨는 해고된 것일까, 스스로 사직한 것일까. 나영이나 지숙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사장을 법적으로 제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근로계약이 종료되는 원인은 여러 가지다. 우선, 정년이나 당사자의 사망처럼 당사자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동 소멸하는 경우가 있고, 계약 당사자인 근로자와 사용자의 상호 합의로 종료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근로자의 일방적인 계약 해지 의사 표시에 의해 종료되는 사직이 있는가 하면 근로자의 의사에 반해 사용자의 일방적인 해지 의사표시로 이뤄지는 해고도 있다. 근로기준법 제23조에서 엄격히 규제하고 있는 해고는 바로 이러한 사용자의 일방적인 근로계약 종료를 의미하는 것이고, 해고가 있었는지 여부는 실제 사업장에서 불리는 명칭이나 그 절차와 상관없이 그 실질을 가지고 판단한다(대법원 1993. 10. 26. 선고 92다54210 판결).
지숙의 근로계약 종료를 해고로 평가하게 되면 이는 근로기준법 제23조의 정당한 사유 존재 여부를 검토하지 않더라도 바로 부당해고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근로기준법 제27조는 사용자가 해고 여부를 더 신중하게 결정하도록 하고, 해고의 존부 및 시기와 사유를 명확히 해 사후에 이를 둘러싼 분쟁 및 근로자의 대응이 용이하고 적절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해고의 사유와 시기를 서면으로 통보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대법원 2015. 9. 10. 선고 2015두41401 판결), 지숙에 대한 구두 해고는 이를 정면으로 위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고 통지서가 없는 경우에는 근로계약의 종료 원인이 과연 해고인지 사직인지 판단이 쉽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다. 즉, 근로자와 사용자 사이에서 ‘이렇게 하면 같이 일 못 한다!’ ‘지금 나보고 나가라는 거냐!’ ‘그렇게 일하려면 차라리 그만둬라’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싫으면 그만두던가!’ 등의 갑론을박 끝에 근로자가 사업장을 이탈하면 근로자는 자신이 해고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사용자는 해고한 적이 없고 근로자 스스로 나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나가라고 한 것이냐’ 아니면 ‘나가겠다고 한 것이냐’의 판단 문제는 분쟁에서는 곧 근로계약 종료 사유에 대한 증명책임과 입증 방법의 문제로 치환된다.
우리 법원은 이러한 경우 대체적으로는 근로자가 ‘해고가 있었음’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해고가 아닌 사직이 있었음’을 입증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서울행정법원 2014. 7. 17. 선고 2013구합30544 판결, 서울행정법원 2008. 1. 18. 선고 2007구합18147 판결). 해고가 구두로 이뤄진 경우 근로자가 해고 사실을 입증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반면 근로자의 사직 의사 표시가 구두로 이뤄진 경우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사직서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 근로자가 이를 거부하고 무단으로 결근하는 경우 이를 징계사유로 삼아 해고할 수 있는 등의 조치가 가능하다. 양 당사자의 지위와 입증의 부담을 감안하고 있는 셈이다 (서울행정법원 2014. 7. 17. 선고 2013구합30544 판결).
따라서 해고인지 사직인지가 다투어지는 경우 사용자는 △근로자가 타사 이직 등으로 사직할 합리적 이유가 있었음을 입증하거나 △사직서 제출, 출근 명령에 관한 근로자의 거부 의사 표시가 있었음을 밝혀야 한다. 근로계약 종료에 대한 거부 의사 부재, 환송회 등 사직을 전제로 했을 때 근로자가 보이는 전형적·통상적 행동 등이 있었음도 근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입증이 이뤄지지 못한 경우에는 근로계약 종료가 실질적인 해고로 간주할 수 있다.
제일서점의 지숙이 사장의 퇴사 요구에 명시적인 거부 의사를 보이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숙이 오랜 기간 애정을 가지고 근무해 온 직장을 스스로 그만둘 사정이 보이지 않는 점, 지숙이 별다른 반발을 하지 않고 짐을 싸서 간 것은 당장 나가라는 사장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올 수 있는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볼 수 있다는 점, 평소 사장의 독단적 언행을 고려하면 ‘그렇게 대들 거면 나가라’고 한 것은 사직 합의에 대한 청약이 아니라 일방적 계약 종료 의사 표시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점 등을 고려하면 지숙의 근로계약 종료가 자신의 의사나 동의에 의한 것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제일서점의 지숙은 스스로 사직한 것이 아니라 사용자에 의해 해고됐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고, 이 경우 지숙의 해고는 실체적 정당성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해고의 서면 통지를 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절차적 하자로 무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모를 일이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설명해 줄 대학생 친구를 갈망했듯이 지숙과 나영도 부당해고 등 구제 절차에 대해 설명해 줄 전문가 친구를 내심 원했을지도. 그렇다면 뮤지컬 빨래에 다른 결말이 있었을지도.
이세리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