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네.”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 뜻밖에 좀 모자란 모습을 보이면 이런 말을 듣는다. 원리원칙을 철저히 지키고 철두철미한 사람은 그 반대다. “비인간적” “컴퓨터 같다” “인공지능(AI) 같다”는 얘기를 듣는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면 “컴퓨터의 ‘노이즈’는 아름다운 존재”라는 박종규 작가(55·사진)의 주장을 이해하기 쉽다. 박 작가는 디지털 이미지의 깨진 부분이나 잡음의 파형(波形) 등 컴퓨터의 각종 노이즈를 확대한 뒤 이를 캔버스에 옮긴다. 이렇게 만든 작품은 인간이 몇 날 며칠을 고민해서 그려낸 추상화 못지않게 ‘예술적’으로 보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컴퓨터에서 아직도 노이즈가 발생한다는 사실에 고마워해야 한다. 컴퓨터가 어떤 노이즈도 내지 않고 완전무결해진다면 인간은 컴퓨터의 노예가 될 것이다.”
서울 삼청동 학고재갤러리에서 박 작가의 작품 40여 점을 소개하는 대규모 개인전 ‘시대의 유령과 유령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활동하는 그는 ‘사람과 컴퓨터의 관계’를 주제로 회화, 조각, 영상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제작하는 중견 작가다. 작품이 다소 난해한데도 해외 미술계 인사와 컬렉터 사이에서 꾸준히 인기를 끄는 것으로 이름났다. 최근에는 일본의 유력 현대미술관인 21세기미술관과 전시를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노이즈가 아름답다”는 박 작가의 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학고재 신관 1층에 전시된 분홍빛 회화 ‘수직적 시간’이다. 진달래꽃이나 흩날리는 벚꽃을 연상하게 하는 이 작품은 원래 흑백 영상작품의 한 장면이었다. “지난해 2월 대구 동성로의 한 건물 전광판에 영상을 상영했는데, 컴퓨터에 오류가 발생하면서 화면이 분홍색으로 송출됐어요. ‘이거다’ 싶어서 정지 장면을 그대로 화폭에 옮겼습니다.”
학고재는 이번 도록과 전시 서문 등 모든 글에서 한글과 영어를 병기했다. 상업 화랑으로는 이례적이다. 전시 기간도 평소보다 1~2주가량 늘렸다. 우찬규 학고재 회장은 “21일 개막하는 홍콩 아트바젤을 관람한 세계 미술계 거물들이 내친김에 광주비엔날레를 보러 한국을 대거 찾을 것”이라며 “그들에게 보여줄 학고재의 ‘대표 주자’로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미감을 겸비한 박종규를 선택하고 전시에 힘을 줬다”고 말했다.
현대미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작품이 다소 난해할 수 있다. 신관 지하 1층의 설치작품 ‘나를 찾아서’가 대표적이다. 이곳에서는 관객들을 찍은 폐쇄회로TV(CCTV) 영상을 틀어주는데, 실시간으로 영상이 나오는 게 아니라 20초 전 모습을 상영한다. 영상에 20초 전의 내 행동이 비친다는 얘기다. 작가는 “우리는 20초 전의 자신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미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이 작품을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미술을 배워서 즐길 의지가 있는 ‘공부하는 관객’이라면 꼭 와볼 만한 수준 높은 전시다. 도록을 함께 구입해 감상하면 더욱 깊이 즐길 수 있다. 독특한 모양으로 주문 제작한 비정형 캔버스를 이용해 평면 작업이지만 각도에 따라 입체처럼 보이게 연출한 작품(‘수직적 시간’) 등 별다른 배경 지식 없이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도 있다. 전시는 4월 29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