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배우 차주영이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한 말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를 통해 큰 관심을 받았지만, 그만큼 많은 '말'에 휩싸여야 했다. 특히 '더 글로리'에서 했던 노출, 알고 보니 '엄친딸'(엄마 친구 딸)이라는 이력 등 차주영을 둘러싼 높은 관심만큼 부풀어진 내용들이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채 퍼져나갔다. 하지만 차주영은 "답답했다"면서도 솔직하고 유쾌하게 자신을 둘러싼 소문들을 정리했다. 인간 차주영의 매력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더 글로리'는 학폭 피해자가 자신을 처절하게 괴롭힌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 차주영이 연기한 최혜정은 세탁소집 딸로 다른 부자 가해자들에게 '충성'하며 피해자 문동은(송혜교 분)에게 위협을 가하지만, 그 스스로 언제든 자신이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친구들을 뛰어 넘는 부를 갈망하는 캐릭터다.
극중 선생님이 된 문동은에게 "스튜어디스 혜정아"라고 불리는 장면은 올해 최고의 '밈'(meme, 패러디물)로 등극하면서 시청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더 글로리'가 글로벌 인기 콘텐츠 1위에 등극한 이후 마주한 차주영은 "이제야 긴장이 풀린 거 같다"면서 "'우아하고 고급진 날라리'라는 반응이 너무 좋았다"면서 혜정이와는 다른 상큼한 미소를 보여줬다.
차주영은 '더 글로리' 출연 배우들 사이에서도 현실과 캐릭터가 가장 다른 사람이라고 꼽힐 정도로 이력도, 말투도, 성격도 모두 혜정이와 달랐다. 유타주립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엘리트 출신이었고, 주변에서 욕을 들어본 적도 없고, 하는 사람도 많지 않아서 "휴대전화에 욕설을 메모해서 차 안에서 연습했다"고 했을 정도다. 오디션에서도 최혜정에 완벽한 외모를 인정받았음에도 끝까지 캐스팅 확정을 받지 못한 이유가 "과연 차주영이 욕을 잘할 수 있을까"란 우려였다고. 하지만 최혜정이 된 후 차주영은 "집 안에서는 '1818' 할 수 없으니 양해를 구했고, '이 시간에는 욕을 하거나 소리를 지를 수 있으니 양해해 달라'고 부탁했다"면서 완변한 최혜정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또한 최혜정의 좋은 점, 공통점을 굳이 고민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혜정이 충분히 욕을 먹길 바라며 동은과 같은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며 "용기를 내는 게 쉽지 않지만, 살다 보면 좋은 사람들도 많고, 좋은 순간들도 찾아온다는 말씀을 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특히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의 경계선에 있었던 혜정에 대해 "어디에 속하면서도 어딘가에도 속할 수 없는 중간이 있다고 생각했다"며 "제가 나오는 장면에서 그런 환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면서 혜정에 대해 고민한 부분을 전했다.
혜정이는 몸이 전부인 캐릭터였다. 부잣집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가슴 수술까지 했다는 설정이고, 실제로 노출 장면도 여럿 등장했다. '더 글로리'가 공개된 후 일각에서는 해당 장면을 놓고, 대역이나 CG가 아니냐는 반응이 많았고, 차주영은 "오늘만을 기다렸다"면서 "저도 준비했고, 대역 배우도 있었고, CG도 맞다"고 솔직하게 밝히면서 논란을 종결지었다.
앞서 "노출 의상을 강요당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던 인터뷰에 대해서도 "제가 입어 보고, 납득이 돼 의상을 착용했던 것"이라며 "혜정이를 보여주는 완벽한 장면이라 생각했고, 제가 그때 몸이 불어있는 상태라 시청자분들이 '이게 캐릭터적으로 납득이 될까' 이 부분에 대한 걱정만 있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대본에서 노출 장면을 보고 고민된 건 없었어요. 혜정이라는 인물을 표현시켜 준 장면이라 생각했어요. 가진 건 몸뚱이밖에 없는 아이가 친구들을 단 한순간도 이겨보지 못했는데, 그 셔츠를 벗어젖힌 순간만큼은 남부러울 게 없겠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찍으면서도 배려를 많이 받았고요. 저희는 꼭 필요한 작업이라 했는데, 이렇게 화제가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혜정이는 평행 열등감을 느끼던 학폭 가해 일당 박연진(임지연 분)보다 더 큰 다이아 반지를 사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첫사랑 전재준(박성훈 분)에게 속아 파혼하고, 박연진이 손명오(김건우)를 죽였다는 증거까지 넘긴 후 버림받는다.
혜정이가 결혼하려 했던 남자의 어머니는 알고 보니 명동 사채 시장을 주무르는 큰 손이었다. 차주영은 "혜정이가 그 정도까지 부자인지 모르고 파혼했을 것"이라며 "그만큼 수가 얕다"면서 웃었다. 그러면서 "명오가 고백할 때 고함지른 건 '찐'(진짜)이었다"며 "너무 소름 끼쳤고, 개인적으로 재준이도 너무 싫다"고 말해 폭소케 했다.
"혜정이의 결말을 보면, 결국엔 살아남긴 했지만 참혹한 거 같아요. 그 친구에게 믿을 건 외모 하나뿐인데, 자신이 가진 무기를 잃은 거고, '이렇게 살 바에야'라는 극단적인 생각도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하지만 혜정이는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회복해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을 거 같아요. 악착같이 목소리도 되찾고요. 그렇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정신 차리고, 잘 살았길 바라봅니다. "
여기저기서 "스튜어디스 혜정아"를 외치고, 심지어 최근에는 방송을 앞둔 KBS 2TV 새 주말드라마 '진짜가 나타났다' 촬영을 위해 공항에 대기하던 중에 승무원들이 "스튜어디스 혜정이다"라고 알아봐 줬다고. 데뷔 이후 최고의 관심을 받고 있지만, 차주영은 덤덤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5개 국어에 능통하다는 건 사실이 아닙니다. 언어를 배운 경험이 있다는 정도입니다", "한인 중 처음으로 학생회장이 됐다는 게 아니라, 학생회에서 처음으로 직책을 맡았습니다"라며 자신을 둘러싼 '과한' 칭찬을 정정했다. 능숙한 외국어 실력 역시 "살아남아야 해서 배운 것"이라고 겸손함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더 글로리'를 통해 인생의 친구들을 만났다"면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제 성향이 이 직업과 딱 들어맞진 않아요. 혼자 조용히 처리하는 게 편하거든요. 어릴 때 유학하면서, 혼자 살아남아야 해서 생긴 독립심이 있어요. 그러다 좋은 작품을 만나면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가면 이렇게 좋구나'를 느꼈어요. 좋은 영향도 받고요. '더 글로리'를 하면서 배우로서 좋은 경험을 했고,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친구들도 생겼어요. 자신감도 얻었고요. 답은 정해지지 않았고, 틀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겠다는 자신감이요."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