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기업 A사의 감사위원회는 최근 해외 자회사인 B사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B사가 현지 회계법인과 세무자문 계약 체결을 앞두고 있는데, 이를 승인해달라는 요청을 담은 메일이었다. A사 관계자는 “올 들어 처음으로 해외 자회사에서 이런 요청이 들어왔다”며 “감사위원회를 다시 열어야 할지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국제회계사연맹(IFAC) 소속 회계법인이 업무를 수행할 때 준수해야 하는 국제윤리기준이 개정되면서 국내 상장회사들이 혼란을 겪고 있다. 외부감사를 맡은 회계법인이 감사 대상 상장사 및 지배·종속회사에 세무·컨설팅 같은 비(非)감사 서비스를 제공할 때 상장사 감사위원회로부터 사전 승인을 받도록 바뀐 것이다. 이 기준은 2021년 개정돼 2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올해부터 적용되기 시작했다. 회계법인의 감사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다.
작년까지 해외 자회사는 현지 회계법인으로부터 비감사 서비스를 받으려면 양 당사자가 서로 협의만 해도 됐다. 올해부터는 한국 본사 감사위원회의 승인도 받아야 한다. 물론 이런 내용은 국내 자회사에도 적용된다.
문제는 국내 기업 대부분이 이를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 공인회계사 윤리기준이 국제윤리기준 개정 내용을 반영하지 않아서다. 삼일·삼정·안진·한영 등 4대 회계법인의 감사를 받는 기업은 국제윤리기준 개정의 영향을 받는다. 이들 회계법인이 각각 PwC, KPMG, 딜로이트, EY 등 글로벌 회계법인의 회원사(멤버펌)이기 때문이다.
국내 및 글로벌 회계법인들이 상장사 감사위원회에 자회사의 비감사 계약 승인을 요구하지만 기업들은 개정 내용을 모르다 보니 대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자연히 비감사 계약 체결도 지연되고 있다.
한 대형 회계법인 관계자는 “감사계약을 맺은 기업에 일일이 상황을 설명하고 승인을 요구하고 있다”며 “특히 감사위원회를 정해진 시기에만 여는 회사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회계법인 관계자는 “국제윤리기준위원회(IESBA)가 허용한 사전 승인 방식을 활용하면 기업이 효율적으로 업무를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국내외 자회사가 제공받을 수 있는 비감사 서비스 목록을 만들어 사전에 한꺼번에 승인해주는 방식이다. 기아, 한국전력 등 감사위원회는 올초 외부감사인과 회의를 열고 비감사 업무 사전승인 정책을 통과시켰다.
서형교 기자 seogy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