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중요 광물 공급망 구축을 위한 핵심원자재법(CRMA)을 조만간 공개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국내 배터리·자동차업계는 바짝 긴장하고 있다. 미국산 배터리 광물을 조달하고, 북미에서 최종 조립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주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이어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할 가능성을 우려하는 모습이다.
14일 업계 등에 따르면 EU 집행위원회는 CRMA 초안을 이번주 발표할 예정이다. 역내에서 최소 10% 이상의 원자재를 조달하고, 전기차 배터리를 모두 재활용해 원자재 회수율을 높이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원자재의 중국 의존도가 높은 국내 배터리업계는 공급망을 근본적으로 재편해야 하는 처지에 놓일 수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폴란드에서, SK온과 삼성SDI는 헝가리에서 배터리 공장을 가동 중인데, 원자재 대부분은 중국산이다. EU는 중·경희토류와 리튬을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국내 배터리 3사는 유럽 내 원자재 조달처를 파악하는 데 분주한 모습이다. 한 배터리업체 관계자는 “단기에 EU에서 핵심 원자재를 채굴하는 것은 어렵다”면서도 “북유럽 쪽에서 리튬 등은 일부 조달이 가능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EU가 제3국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구축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다른 나라를 통한 공급망 다변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배터리 재활용을 통한 원자재 회수와 관련해선 국내 폐배터리업체와 동반 진출해서 협력하는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성일하이텍 등 폐배터리기업이 후보로 거론된다. 폐배터리 공장이 EU의 강한 환경 규제를 충족할지는 의문이라는 게 업계 분석이다.
유럽 시장 점유율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려는 자동차업계도 CRMA에 따라 전기차 현지 생산 압박이 강화될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 현대자동차와 기아는 각각 코나 전기차, 니로 전기차 등을 앞세워 지난해 유럽에서 역대 최고 점유율(9.4%)을 달성했지만, 현지에서 생산하는 전기차는 체코 공장의 코나뿐이다. 업계에서는 현대차가 체코 공장의 전기차 라인을 증설하고, 기아는 2025년으로 예정된 슬로바키아 공장의 전기차 라인 전환을 앞당길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차·기아의 유럽 현지 생산 물량이 늘면 국내 자동차 부품업체는 타격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IRA에 이어 CRMA까지 시행되면 국내 자동차 생태계에 큰 변화가 생길 수 있다”며 “한국도 전기차 시설투자 세액공제 확대 등 법·제도적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일규 기자 black0419@hankyung.com